원전 주변에 사는 개와 16㎞ 떨어진 시내에 사는 개, 유전적으로 크게 달라
암·DNA 복구·면역 유전자 주변에 ‘선택’ 흔적…우연만으로는 설명 안 돼
방사능 때문인지는 불분명…중금속 등 오염물질 뒤섞여
[헤럴드경제=장윤우 기자]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주변에서 40년 가까이 살아온 개들의 유전자에서 오염된 환경에 적응해 온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됐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주민들은 급히 대피하면서 키우던 반려견을 두고 떠나야 했다. 이후 투입된 처리 인력이 남은 동물들을 없앴지만, 살아남은 개들이 무리를 이뤄 지금은 수백 마리가 원전 주변 출입금지구역에 살고 있다.
이 개들은 대부분 원전에서 3㎞ 떨어진 도시 프리피야트에서 버려진 반려견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사고 이후 원전 주변은 방사성 물질뿐 아니라 버려진 군사·산업 시설에서 나온 중금속과 유기화합물, 석면 등으로 오염됐다. 개들은 이런 환경에서 30세대 넘게 대를 이어 살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0월에는 이 지역에서 털이 파랗게 변한 개들이 발견돼 방사능 때문에 돌연변이가 생긴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최근 국제학술지 Genes 제17권 제10호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메건 딜런과 매슈 브린 교수 연구팀은 체르노빌 원전 주변에 사는 개들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16㎞ 떨어진 개들과 유전자 크게 달라
연구팀은 앞선 연구에서 원전 부지에 사는 개들과 원전에서 16㎞ 떨어진 체르노빌 시내에 사는 개들이 유전적으로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체르노빌 시내는 원전 부지보다 오염이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르노빌 시내 개들은 가까운 지역에 사는 원전 주변 개들보다 러시아나 폴란드의 떠돌이 개들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웠다.
연구팀은 이번에 유전자 차이가 우연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에 적응한 결과인지를 살펴봤다. 한 지역에 사는 수가 적으면 세대를 거쳐 가면서 많은 유전자가 섞일 수 없기 때문에 특정 유전자가 우연히 늘거나 줄어드는 ‘유전적 부동’이 일어나 다른 지역과 유전자가 달라질 수 있다.
연구팀은 수십 년 동안 다른 무리와 떨어져 살아온 남미 갈라파고스제도의 떠돌이 개들과도 비교했다. 갈라파고스 개들도 30년 전쯤 대량으로 살처분된 적이 있어 체르노빌 개와 비슷한 역사를 거쳤다.
그런데 연구팀이 확인해 본 결과 갈라파고스 개들은 원전 주변에 사는 개보다 체르노빌 시내에 사는 개나 유럽의 떠돌이 개들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웠다.
원전 주변에 사는 개들의 수는 체르노빌 시내에 사는 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전적 다양성도 다른 지역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연구팀은 유전적 부동이 일어났다면 유전체 전체가 비슷하게 달라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원전 주변에 사는 개들은 8번, 14번, 26번, 27번 염색체 같은 특정 부위에서만 유독 차이가 컸다. 연구팀은 우연만으로는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봤다.
암·DNA 복구 유전자 특히 달라
연구팀은 원전 주변에 사는 개들에게서 유독 달라진 유전자 부위 1138곳을 찾아냈다. 이 지점들은 흩어져 있지 않고 DNA의 특정 구간인 ‘유전체 영역’ 130곳에 몰려 있었다.
연구팀이 차이가 생긴 DNA의 유전체 영역 근처에 있는 유전자를 분석해 보니 암과 관련된 유전자가 가장 많았다. 손상된 DNA를 복구하는 유전자, 세포의 생존과 죽음에 관여하는 유전자, 면역 관련 유전자도 많았다.
연구팀은 사고 직후 원전 주변의 개들 가운데 원래 이런 유전자 덕분에 어려서 암에 걸리지 않거나 독성 물질의 피해를 덜 입은 개들이 살아남아 새끼를 남겼을 수 있다고 봤다.
방사능에 견디는 개들만 살아남은 결과 원전 주변에 사는 개들 전체의 유전자 구성이 달라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에서는 다른 생물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 새는 활성산소에 견디는 능력이 높았고, 자작나무 같은 식물은 DNA 복구 능력이 좋은 것으로 보고됐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원전 주변의 개들과 다른 지역의 개들간의 큰 유전적 차이는 우연만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며 “자연선택이 원전 주변 개들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다만 연구팀은 어떤 환경 요인이 이런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밝히지 못했다. 원전 주변에는 방사성 물질과 중금속, 유기화합물 등이 뒤섞여 있어, 방사능 때문인지 다른 오염물질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사고 이전 개들의 시료나 당시 오염물질 자료도 없어, 진화 과정을 직접 추적하지도 못했다. 이번 연구는 유전자의 통계적 패턴을 분석한 것으로 원전 주변에 사는 개들이 실제로 암에 덜 걸리거나 방사선에 더 강한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참고논문
DOI : 10.3390/genes17101195
논문 정보 : Dillon, M.N.; Roberts, R.B.; Betz, J.A.; Mousseau, T.A.; Kleiman, N.J.; Breen, M. Evidence of Selective Response in the Free-Breeding Dog Population in Chornobyl. Genes 2026, 17, 1195.
dbsdn1110@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