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중국 정부가 해외 자산에 대한 과세와 감시를 강화하자 중국 부유층 사이에서 국적 포기까지 검토하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해외에 보유한 재산에 세금이 부과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외국 시민권과 영주권을 확보하려는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일부 자산가들은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주식을 매각하거나 해외 신탁을 해지하는 등 자산 구조조정에도 나서고 있다.
30일 미국 CNBC와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중국 당국이 지난 7월 해외 신탁에 대한 과세를 강화한 이후 중국 부유층의 투자이민 상담이 크게 늘었다.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세이버리앤드파트너스는 지난 7월 이후 중국인 고객의 문의가 33% 증가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업체인 글로벌시티즌솔루션스에서도 중국인 문의가 전년 동기 대비 약 40% 늘었다.
과거에는 해외 거주권 확보에 관심을 보이던 부유층들이 최근에는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취득하는 방안까지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해외 신탁에 세금 20%…부자 순위 뒤져 과세 대상 추적
중국 부유층의 해외 이주 움직임이 활발해진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 정부의 해외 자산 과세 강화다.
중국 당국은 지난 7월 해외 신탁에 편입된 자산과 관련 소득에 대해 개인소득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본격화했다. 일부 소득과 거래에서 발생한 이익에는 20%의 세율이 적용된다.
해외 신탁은 개인이 보유한 주식이나 현금 등을 해외 금융기관 또는 수탁자에게 맡겨 관리하는 자산 운용 방식이다. 중국 부유층은 홍콩과 싱가포르 등에서 신탁을 설정해 재산을 관리하거나 자녀에게 이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해외 신탁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한 세금 징수를 강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중국 세무당국은 해외 신탁 소득에 대한 신고 기한을 이달 22일로 정하고 관련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특히 홍콩과 미국 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의 창업자와 대주주들이 주요 과세 대상으로 거론된다.
이들은 2014~2020년 주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던 시기에 해외 신탁을 통해 보유 주식을 매각하거나 배당금을 받은 경우가 많다. 당시 발생한 이익에 대한 세금이 뒤늦게 부과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자산관리업체 JLT레거시그룹의 오스카 류 최고경영자(CEO)는 개별 자산가에게 부과될 세금이 수백만 위안에서 수억 위안, 일부 사례에서는 수십억 위안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다.
과세 대상자를 찾아내는 방식도 강화되고 있다.
로이터는 중국 세무당국이 중국 부자 순위인 후룬 부자 명단과 기업 공시, 공개된 재산 관련 정보를 활용해 해외 자산 보유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유한 기업인이 집중된 일부 지역에서는 해외 신탁 관련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전담 조직까지 설치된 것으로 전해졌다.
갑작스러운 세금 부담에 자산을 처분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한 중국 기술기업 억만장자의 패밀리오피스는 세금 계산과 납부 준비에 상당한 시간을 투입하면서 주식 투자자산의 약 절반을 매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부유층은 보유 주식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세금을 납부할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 새로 설립한 해외 신탁을 실제 자산 이전 전에 해지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해외 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동시에 자본 유출에 대한 감독도 확대하고 있다. 경기 둔화와 내수 부진으로 재정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해외로 이동한 자산에 대한 세금 징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분석된다.
“이제는 실제로 국적 포기하겠다고”…카리브해 시민권 인기
해외 자산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면서 일부 중국 부유층은 외국 시민권 취득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중국은 이중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 국적법에 따르면 외국에 정착한 중국인이 자발적으로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면 중국 국적을 자동으로 상실한다.
따라서 외국 시민권 확보는 기존 중국 국적을 포기하는 중대한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싱가포르 법무법인 베이프런트로의 라이언 린 이사는 CNBC에 지난 7월 이후 국적 포기를 검토하는 중국 부유층이 늘었다고 밝혔다.
과거에는 중국 국적을 포기할 수 있는지 가능성을 문의하는 수준이었다면, 최근에는 실제로 국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고객이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투자이민업체 아톤캐피털의 아르망 아톤 CEO도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여러 외국 여권을 확보하려는 고객들이 있다고 전했다.
해외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이유는 세금 문제뿐 아니라 국제 이동의 편의성과 사업 활동,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에 대한 우려도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빠른 시민권 취득을 원하는 부유층은 카리브해 국가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앤티가바부다 등 일부 카리브해 국가는 일정 금액을 투자하거나 국가 발전기금에 기부하면 시민권을 부여하는 투자 시민권 제도를 운영한다.
자격 요건과 심사 절차를 충족하면 약 6개월 안에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장기간 거주한 뒤 귀화 절차를 밟아야 하는 방식보다 시간이 짧다는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글로벌시티즌솔루션스에 따르면 올해 중국인들의 투자이민 문의 증가세가 가장 두드러진 지역도 카리브해였다.
중국 부유층이 해외 시민권을 원하는 이유는 반드시 해당 국가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해외 사업 활동과 국제 이동을 위한 추가적인 선택지를 확보하려는 목적도 크다.
싱가포르 자산관리업체 패로캐피털의 마니시 티브레왈 공동창업자는 지난 7월 이후 다른 나라 시민권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중국 가문이 지난해 실제로 시민권 취득 절차를 마친 가문보다 훨씬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부 중국 가문이 카리브해 시민권과 싱가포르 영주권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싱가포르 시민권 취득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 골든비자·싱가포르 영주권도 인기…국적 포기 없이 해외 거점 확보
중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해외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려는 부유층도 많다.
이들은 외국 시민권 대신 투자 거주권이나 장기체류 비자 등을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목적지는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헝가리 등 유럽 국가들이다.
포르투갈은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투자를 통해 거주권을 부여하는 ‘골든비자’ 제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장기적으로 거주 요건 등을 충족하면 시민권 취득도 신청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해외에서 이주한 고액 자산가들에게 적용되는 세제 혜택과 국제학교, 금융서비스 등을 앞세워 부유층을 유치하고 있다.
헝가리도 새로운 투자이민 목적지로 부상했다.
헝가리는 일정 요건을 갖춘 펀드에 최소 25만유로(약 3억7500만원)를 투자하면 장기 거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해당 거주권은 솅겐 지역 내 이동 편의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해외 거점을 원하는 자산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글로벌시티즌솔루션스는 유럽 주요국이 기존 골든비자 제도를 폐지하거나 투자 요건을 강화하면서 헝가리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가 여전히 주요 목적지로 꼽힌다.
정치적 안정성과 발달한 자산관리 산업, 국제학교 등 교육 인프라를 갖춘 데다 중국 본토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싱가포르에 자산을 보유하고 영주권을 취득하려는 중국 가문도 늘고 있다. 다만 영주권 취득이 곧바로 시민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귀화 여부는 싱가포르 정부의 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호주 역시 교육과 생활환경을 중시하는 부유층에게 인기가 높다.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와 페낭도 상대적으로 낮은 생활비와 중국어 사용 공동체, 국제학교 등을 바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밖에 아르헨티나와 세르비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등도 새로운 해외 거주지 후보로 거론된다.
다만 외국 시민권을 취득하더라도 기존에 발생한 세금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국 세무당국은 납세자의 주요 경제적 이해관계가 중국에 있는지 등을 판단해 해외 소득에 대한 과세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국적을 바꾸더라도 과거에 발생한 투자 수익이나 거래에 대한 세금은 자산 구조와 거주자 판정에 따라 남을 수 있다는 의미다.
베이프런트로의 린 이사는 실제 국적 포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부유층은 대부분 중국 본토에 남아 있는 사업 기반이 적고, 재산과 기업 운영의 상당 부분을 이미 해외로 이전한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국적 포기를 검토하는 움직임과 실제 이민 규모에도 차이가 있다.
한편 로이터는 30일 중국의 해외 소득 과세 강화에도 홍콩을 중심으로 한 자산관리 사업의 신규 자금 유입은 견조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세금 부담이 늘더라도 중국 내 부동산 시장 침체와 낮은 금리 등으로 해외 투자 수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톤캐피털의 아톤 CEO는 해외 거주권을 검토하는 것과 여러 나라 여권을 확보하는 것, 가족 전체가 실제로 이주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해외 자산 과세 강화가 부유층의 자산 운용 방식과 국적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글로벌 투자이민 시장에서도 중국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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