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롬프트의 신법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책상 오른쪽 위에 놓인 시계가 밤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은은 차갑게 식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두 달 전에서 멈춰버린 대화가 화면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와 헤어진 지 두 달째였다. 4월에 만나 6월에 헤어졌으니 사랑했던 시간도 고작 두 달 남짓이었다. 둘 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였다. 지은 역시 첫 만남 이후 자연스럽게 그와의 다음을 생각했다. 그럴 만큼 좋았다. 문제는 싸우고 난 뒤였다. 그는 난처하거나 불리한 상황이 생기면 입을 닫았다. 처음에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렸다. 그러나 침묵을 끝내는 사람은 늘 지은이었다. 그가 마음의 문을 닫을 때마다 지은이 먼저 그 앞에 가서 두드려야 했다. 결국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도 지은이었다. 더는 누군가의 침묵 하나 때문에 가슴 위에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헤어진 뒤 한동안은 정말 가벼웠다. 잘한 선택이라고 생
2026.09.01 09:04
좋은 소식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강남으로 향하는 광역버스는 삼포세대의 분노처럼 붉다. 시뻘건 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유튜브를 훑는데 뉴스 제목이 눈에 띈다. “다시 결혼하는 한국... 혼인율 반등, 2026년에도 이어져” 눈 부신 기사다. 과장이 아니다. 햇볕 드는 창가에 앉았더니 진짜 눈이 부시다. 핸드폰 밝기를 최대로 올렸다. 가뜩이나 청담대교의 회전 구간 위에서 차량이 핑핑 도는데 눈까지 부셔 오니 간밤의 숙취가 밀려들어 미칠 지경이다. 지난밤에는 대학 동기의 청모에서 조금 거칠게 술을 마셨다. 신부 되는 친구가 환골탈태를 앞두고 3차까지 쐈던 거 같은데 리쥬란 시술을 받은 피부가 홍옥처럼 빛났다. 필름이 끊겼는데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거라곤 이런 순간이었다. 바짝 졸아든 나베니 전골이니 하는 걸 앞에 두고 내가 떠들고 있었다. 요새 내가 갖는 모임이 딱 두 종류야. 뭔지 알아? 하나는 청첩장 주는 모임이고, 또 하나는 청첩장 설마 주려고 부르나? 싶은 모임. 청모와 청설모인 셈이지. 으하하! 아무도 웃지 않았
2026.08.18 20:00
장대한 분노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세 번째였다, 재영의 방에 초대된 것은. 저녁을 먹을 때부터 아니, 영화를 볼 때부터 아니 아니, 오늘 데이트 날짜를 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알고 있었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라는 것을. CC(Campus Couple)라 매일 붙어 다닌 것에 비해 재영과 나는 진도를 천천히 나가고 있었다. 사귄 지 100일이 넘었으니 과 애들은 우리가 당연히 잤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요즘 애들’과 달랐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 재영이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는 것. 과대이자 총여학생회 회장이기도 한 재영은 자기주장이 강했고 합리적인 것을 좋아했다. 절대 흐지부지한 꼴은 못 봤다. 바로 지금처럼. “콘돔 없이는 절대 안 돼.” 나는 나의 무계획성에 머리를 벽에 찧고 싶었다. 그걸 왜 안 챙겼을까. “딱 한 번인데…” “한버언?” 재영이 한 쪽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쳐다봤다. 주인의 목소리에 미세한 분노를 느꼈는지 발밑에서 으르렁 소리가 들려왔다. “울프, 조용해.” 재영의 경고에 울
2026.08.04 08:40
허락받고 먹어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 이 밥 말이야. - 밥이 어때서? - 우리한테 주어진 이 소중한 밥말이지. 우리, 허락받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 주목사. 7년 동안 별 탈 없이 지내던 김목사가 어느 날 내게 이런 주제를 가지고 왔다. 김목사와 나는 특별한 관계였다. 일단 동갑이란 점이 특별했고, 감리교, 장로교, 이렇게 대형 교단이 즐비한 가운데 상대적으로 작은 소수 교단 출신이란 점도 특별했다. 목사 안수를 받은 시점도 동일했고, 둘 다 성장과는 관계없는 작은 교회를 운영한다는 점도 특별했다. 이후, 우리 둘의 길은 달라졌다. 김목사는 ‘목사는 오직 목사라는 성직에만 매달려야 한다’며 은근히 작가 일을 병행하는 나를 비난하는 듯한 말을 선언하듯 던진 뒤, 그는 이른바 신도 수가 스무 명이 되지 않는 초소형 교회를 16년 동안 운영했고, 나도 나름 글 쓰는 일로 돈벌이하며, 그와 엇비슷한 초소형 교회를 16년 동안 운영했다. 인생도, 성직의 길도 무류(無類)했다. 종교, 그중에도 기독교인 교회는 AI(인공지능
2026.07.22 08:51
엄마의 선택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혜윤은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달렸다. 무릎 수술을 한 지 두 달 된 엄마를 세워둘 순 없었다. 혜윤은 새희망금고 앞에서 숨을 고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지금 어디야? 나는 은행 앞.” “벌써 왔지. 어서 안으로 들어와.” 은행에 온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바일뱅킹으로 은행 업무를 보고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기 때문에 은행에 올 일이 드물었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다섯 개의 둥근 탁자에 각기 서너 명의 노인이 둘러앉아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던 엄마가 혜윤에게 손을 흔들었고, 혜윤은 엄마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 옆에는 지팡이가 세워져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할머니도 무릎 수술을 한 것 같았다. 엄마에게 여섯 달이 지나면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면서 걷기 연습을 하라고 조언했다. 엄마의 순서가 되자 엄마는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절룩이며 창구로 다가갔다. 혜윤도 엄마를 따라갔다. 은행원이 엄마 뒤에 선 혜윤에게 물었다. “따
2026.06.16 08:00
운수 좋은 날[‘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정오에 가까운 시각, 조명주에게 문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작가님, ‘고전 앤설로지’ 중쇄했습니다! 혹시 수정사항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중, 중쇄라고? 내가?” 조명주는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십 년 전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작은 공모전으로 입선해 소설가로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세 권의 장편소설과 네 권의 앤설로지를 출간했지만 단 한 번도 중쇄를 한 적은 없었다. 이런 그에게 출간한지 반 년이 넘은 책이 갑작스레 중쇄를 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빠르게 감사하다고 답을 보낸 후 주방으로 향했다. 믹스커피를 한 잔 타서 홀짝이며 핸드폰으로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조명주’로 검색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이름으로 에고서치를 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동명이인 조명주들의 성과만 쭈루룩 뜰 뿐이었다. ‘고전 앤설로지’와 ‘운수 좋은 날’로 검색을 해보아도 결과는 별 것 없었다. 반 년 전, 신간이 나왔을 무렵 서평 이벤트를 통해 적은 리뷰들만 계속 나왔다. S
2026.06.04 08:33
숨이 차오를 때까지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나는 그저 달리고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분노에 차올라 무작정 달렸을 뿐이다. 비탈진 흙길에서 뛰려니 숨이 차오르고 열이 치솟았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숨이 끊어질 듯한 지경일 때 차라리 끊어지기를 바랐다. 커다란 버드나무 너머로 호수가 보였다. 호반에 조성된 산책로에서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갑작스레 나타난 사람들 틈에 휩싸여 몸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달렸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달리고 있기에 누구에게도 왜 달리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인파에 섞여 10분쯤 달리고 나니 다들 한 자리에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 사이에 서 있자 누군가 내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인증 도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이것을 왜 찍어주느냐고 다시 묻자 달리기 대회 완주 경품 수령을 위해 도장을 꼭 받아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제야 나는 오늘 이곳 호반에서 달리기 대회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더 이상 뛰고 싶지 않았고
2026.05.19 09:24
절대 메뉴 제육볶음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김 차장을 처음 만난 곳은 ‘제육향’ 정모 자리였다. ‘제육향’은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DMC 업무지구 일대 직장인들의 연합 동호회로, 구내식당 점심 메뉴에 제육볶음이 나오면 채팅방에 신속히 공유하는 걸 활동 목표로 삼고 있었다. 김 차장은 제육향에서 사무국장 직을 맡고 있었는데 내가 그를 만났을 즈음에는 실질적으로 모임을 이끌어가는 리더나 다름없었다. 회장이 탄핵돼 지도부가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탄핵 사유는 조직에 대한 불충이었다. 분명히 점심에 제육볶음이 나왔는데 전체 회원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가 만든 소규모 채팅방에만 따로 알린 게 발각된 거다. 회장 없이도 제육향의 몸집은 계속 커졌다. 회원 수가 150명에 이른 뒤부터는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존재감이 커질수록 파급 효과 역시 커지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는 일상의 작은 행복을 위해 공유한 정보에 불과했지만 업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사뭇 달랐다. 특히 구내식당 쪽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제육향 회원들이 쓸고
2026.05.05 08:00
건도와 명도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저기요, 혹시 건도하세요?” 돌아보니 언더아머 로고가 들어간 검은 민소매 차림의 근육질 청년이 수줍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대꾸하려 했지만 입에선 말 대신 가쁜 숨만 연달아 터져나왔다. 대답 대신 트레드밀 계기판을 가리켜 보였다. 지금 당신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선 이것의 속도를 줄여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는 처지라는 걸 피차 알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그는 내 말을 바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나머지 오 분 가량을 채우고 나서야 나는 트레드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숨을 헉헉거리며 정수기로 걸어가 물병에 물을 채워 들이켰다. 그러는 동안 헬스장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언더아머 청년이 쭈뼛거리며 다시 다가왔다. “그쪽도 건도세요?” 내가 묻자 그는 망설이다 대답했다. “…아직은 아닌데, 그러고 싶어서요.” 나는 물을 마시며 언더아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좀 과하다 싶게 펌핑된 이두박근, 탄탄한 가슴 근육에 구릿빛 피부. 지금 당장 보디 프로필을 찍으러 가도
2026.04.21 16:01
특공대 [‘오늘’에 대한 우리 이야기]
마을 버스가 종점에 멈추자 승객들이 내렸다. 막차라서 그런지 승객은 재현을 포함해서 세 명 뿐이었다.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낀 재현은 빌라들이 있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며 걷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오늘의 목적지인 월령동 대환 빌라가 바로 코 앞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자 바로 앞에 대환 빌라가 보였는데 붉은 벽돌과 대리석으로 만든 대한민국에 무수히 많은 다세대 빌라 중 하나였다. 밤늦은 시간이라 골목길에는 인적이 끊긴 상태였다. 재현은 대환 빌라 앞으로 가서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자 현관의 센서등이 켜지면서 계단이 보였다. 재현은 계단을 오르면서 오늘의 목적지를 중얼거렸다. “204호.” 계단을 오르자 복도가 쭉 펼쳐졌다. 앞뒤로 긴 빌라라서 복도 좌우로 어긋나게 현관문들이 있는 형태였다. 204호는 복도 끝이라고 반장이 텔레그램으로 전달했었다. 반장의 본명은 몰랐다. 반장 역시 그를 특공대 14라고 불렀다. 앞에 13명의 다
2026.04.07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