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자에게 숫자는 기사의 가장 강력한 근거다. 아무리 대단한 단독 정보를 확보했다 한들 유효한 데이터로 뒷받침하지 못하면 한낱 ‘뇌피셜’에 불과하다. 숫자를 구하고 이를 철저하게 교차 검증하는 일이 취재의 중요한 과정인 이유다.

그런데 요즘 이 숫자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경제는 숫자로 말한다. 성장률이 얼마인지,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지, 실업률이 몇 퍼센트인지가 한 나라 경제의 성적표가 된다. 숫자는 객관적이고 비교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지표에 주목하고 그 숫자에 울고 웃는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경제지표만 보면 한국 경제는 순항 중이다. 올해 성장률 전망은 3% 중반까지 높아졌고, 연간 수출 1조달러 달성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미국·중국·독일에 이어 세계 네 번째 ‘수출 1조달러 클럽’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4일 나온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8%로 두 달 연속 2%대를 유지했다. 취업자 수는 9월 2926만6000명으로 1년 전보다 11만3000명 늘었다. 석 달 연속 증가 폭이 10만명을 웃돌았다.

하지만 경제지표가 보여주는 풍경과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사뭇 다르다. 회사나 집 근처 상가만 둘러봐도 ‘임대 문의’가 붙은 빈 점포들이 1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 같으면 권리금을 따질 겨를도 없이 간판을 바꿔 달았을 목 좋은 상권마저 찬바람이 분다.

물가는 또 어떤가. 장바구니에 담은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계산대에서는 10만원을 훌쩍 넘긴다. 외식 한 끼도 쉽게 기분 내기 어려울 만큼 비싸졌다. 월급은 그야말로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 직장인들의 통장에 월급 다음 날 급여의 57%, 열흘 뒤에는 22%만 남는다는 한 시중은행의 조사 결과는 이런 부담이 개인의 엄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장률과 수출은 개선되고 고용도 늘었다는데, 정작 살림살이는 나아졌다는 느낌이 없다. 경제지표가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지표만으로 경제의 모든 현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물가 통계가 대표적이다. 물가 상승률은 가격 수준이 아니라 일정 기간 가격의 변동 폭을 보여준다. 상승률이 낮아졌다고 물건값이 내려간 것은 아니다. 가격이 오르는 속도가 느려졌을 뿐이다. 특히 외식비와 가공식품처럼 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가격이 계속 오르면 소비자가 느끼는 부담은 통계상의 상승률보다 클 수밖에 없다. 석유류 가격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석유최고가격제가 없었다면 10월 물가 상승률이 3.6%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정책적 가격 억제 장치가 물가를 약 0.8%포인트 낮췄다는 설명이다.

고용 통계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취업을 준비하다 지쳐 구직 자체를 포기한 사람은 실업자가 아니라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 오히려 실업률이 낮아지는 역설도 가능하다.

숫자는 객관적인 사실을 담지만, 무엇을 측정하고 어떤 숫자를 앞세우느냐에 따라 현실의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숫자 자체의 정확성만큼이나 그 숫자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거짓말쟁이들은 숫자를 이용할 궁리만 한다”는 통계학자 캐럴 라이트의 경고가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한희라 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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