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이게 다 먹이에요”
강원도 철원군 민간인통제선(민통선) 안쪽에 자리한 논. 벼를 수확한 농기계가 지나간 자리에는 수많은 낟알이 떨어져 있었다.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다. 일 년 가까이 정성껏 키운 벼를 수확하는 날이다. 농민들이라면 한 톨이라도 더 거두고 싶을 것. 하지만 멀쩡한 낟알은 그대로 땅에 남겨졌다.
놀라운 점은 누구 하나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것. 현장의 농민은 바닥에 떨어진 볍씨를 매만지며 “이런 것들이 다 먹이가 된다”고 설명했다.
대체 누구를 위한 먹이일까.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천연기념물 ‘두루미’다. 이들은 매년 겨울이면 철원평야를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특별한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언뜻 보면, 농민의 손해를 감수하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는 일. 누군가는 ‘식량 낭비’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밥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차려진 게 아니다.
국내 쌀 생산량이 수요를 웃돌아 정부가 재배면적까지 조정하는 상황.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하는 대신, 생산한 곡식을 멸종위기종의 먹이로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농민들은 농사를 이어가며 경제적 보상을 받고, 두루미는 안정적인 먹이와 서식공간을 얻는다. 이에 따라 지역의 생태적·관광적 가치까지 높일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올해도 철원 찾는 두루미…“전 세계 유일무이한 풍경”
지난 24일 세계자연기금(WWF)이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안쪽에 자리한 논에서 철원두루미운영협의체와 함께 추진하는 ‘두루미 먹이벼 존치사업’ 현장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농지에서는 남들보다 일찍 찾아온 재두루미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두루미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정작 야생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존재다. 흰 몸통에 검은 목, 머리 위로 드러난 붉은 정수리. 키가 약 150㎝에 달하는 커다란 새다. 예로부터 ‘학’이라고 불리며, 장수와 평화를 상징하는 귀한 동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상황은 그리 평화롭지 않다. 두루미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보호 등급인 멸종위기 야생생물 Ⅰ급으로 지정돼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지구 전체를 통틀어도 몇천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은 희귀한 새인 셈이다.
이날 등장한 ‘재두루미’도 마찬가지. 눈을 둘러싼 얼굴 피부는 붉은색, 몸통이 회색빛을 띠고 목 뒤쪽이 희게 보이는 재두루미는 국내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이다. 역시 천연기념물이며 IUCN 적색목록에서도 ‘취약’ 종으로 분류된다.
두루미와 재두루미는 주로 러시아 극동지역과 중국 동북부 등에서 번식한 뒤, 겨울이 찾아오면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먼 길을 날아와 겨울을 보내는 대표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가 철원평야다.
백종한 두루미운영협의체 전 회장은 “지금 보이는 두루미 숫자는 12월 한창 때와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라며 “전 세계에서, 눈 내린 평야 위로 수천마리의 두루미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철원이 유일무이하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해 11월 29일 철원군이 실시한 두루미류 모니터링 조사에서는 총 1만1640마리가 관찰됐다. 재두루미가 1만2마리로 가장 많았고, 두루미 1567마리, 흑두루미 60마리, 캐나다두루미 10마리, 검은목두루미 1마리 등이 확인됐다.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멸종위기종들이 철원평야 한 곳에 대규모로 모여들고 있다는 것.
지역 농민과 두루미, 상생 방안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두루미가 찾아오더라도, 이들이 철원에서 안전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충분한 먹이와 물, 그리고 천적을 피해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어느 하나라도 부족해지면 아무리 좋은 월동지라도 오래 머물기 어려워진다.
이에 두루미운영협의체를 비롯한 지역 농민들과 WWF가 뜻을 모았다. 철원이 더 나은 두루미 월동지로 발돋움 하는 데 힘써, 후대에 문화유산 및 관광자원으로 물려줘야 한다는 목표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먹이. 두루미는 겨울철 논이나 밭을 돌아다니며 벼와 옥수수 등 곡식의 낟알을 먹는다. 그런데 농민들이 벼를 수확하고 나면 논에 남는 먹이는 많지 않다.
이를 위해 추진된 게 ‘볏짚 존치사업’. 방법은 간단하다. 가을철 벼를 수확한 뒤 볏짚을 논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 이렇게 하면 수확 과정에서 일부 탈락한 낟알이 논에 남아, 철새의 먹이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떨어진 낟알로는 양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가을철 비가 많이 내리는 것도 문제다. 논바닥에 남아 있던 낟알이 빗물에 잠기면 발아하거나 썩어버릴 수 있다.
유종현 두루미운영협의체 사무국장은 “비가 많이 와서 잠겨버리면 낟알이 썩거나 발아할 수 있다”며 “그러면 먹이 자원으로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 바로 이번 ‘두루미 먹이벼 존치사업’이다. 기존 볏짚 존치가 벼를 수확하고 남은 낟알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벼 일부를 수확하지 않고 남겨두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는 두루미의 주요 먹이활동 지역에 있는 농민들과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한 면적의 벼는 일반적인 수확 시기가 찾아와도 거둬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남겨둔 벼를 두루미들이 철원에 찾아오는 시기에 맞춰 탈곡하는 것이다.
WWF에 따르면 올해 사업에는 철원 지역 농가 3곳이 참여했다. 총 1만395㎡, 약 3145평의 논에서 생산한 벼를 두루미의 먹이로 활용한다.
농민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논을 쉬게 하는 대신, 정상적으로 벼를 재배하면서도 생산한 곡식을 생태계 보전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한 논을 두루미를 위해 내어주는 농민들에게 적정한 보상을 지급한다.
두루미운영협의체 회원 서경원 씨는 “농민들은 농사를 계속 지어야 논도 관리할 수 있다”며 “이런 사업이 확대되면 농민과 행정, 두루미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잠자리를 만드는 ‘무논 조성’도 대표적인 두루미 보호 사업의 일환. 무논은 벼를 수확한 뒤 논에 물을 채워 얕은 습지처럼 만드는 것이다. 물이 고인 논은 포식자의 접근을 경계하며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WWF는 지난해 철원 지역 11개 농가와 협력해 총 28만㎡ 규모의 무논을 조성했다. 농민들의 활동비와 복구지원비 등을 지원하며, 두루미들이 안전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 서식지 조성에 힘을 보탰다. 여기에 올해는 먹이벼 존치사업까지 더해진 것.
유 사무국장은 “논에 30cm 정도의 물을 채워 놓으면, 삵 등 두루미의 천적이 접근할 수 없어 안전한 잠자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WWF는 두루미가 하늘을 날다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활동도 추진 중이다. 전선 충돌사고 예방사업이다. 2018년부터 2025년까지 동송저수지와 대위리 검문소 일대에서 두루미류 6개체의 전선 충돌사고가 확인됐다. 이에 WWF는 관계기관과 협력해 전선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가공지선 철거와 안전 표식 설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수십 년 ‘두루미’ 위한 정성…주민들 마음까지 돌렸다
이 모든 활동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오랫동안 두루미와 함께 살아온 철원 주민들이다. 특히 두루미운영협의체는 지역 농민과 주민, 보호단체 등이 참여하는 조직이다. 두루미 먹이 공급부터 서식지 관리, 개체수 조사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철원에서 두루미 보호가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민통선 안쪽의 농민들은 이미 군사시설 보호 등에 따른 여러 제약을 받으며 살아왔다. 여기다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농경지 이용을 제한하는 정책이 추진되자 주민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나왔다. 먹이를 주는 것조차 달갑지 않게 바라보는 주민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두루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백종한 전 회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두루미 사랑은 어린 시절 가족의 기억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그의 어머니는 철원을 찾는 두루미를 귀한 손님으로 여기며 먹이를 나눠줬다고 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두루미는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철원을 찾아왔다.
백 전 회장은 어머니 세대부터 이어진 두루미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주민들의 반발에도 두루미 보호를 포기하지 않고, 먹이를 공급하면서 주민들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다.
이러한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었다. 이제는 주민들이 직접 농경지를 두루미의 먹이터로 내어주고, 보호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이어온 노력이 지역사회 전체의 보전활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백 전 회장은 “철원의 두루미야말로, 후대에 계속 물려줄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지켜낸 두루미는 이제 철원의 중요한 관광자원으로도 자리 잡고 있다. 철원군에 따르면 매년 5000명 이상이 두루미 탐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농민들이 남겨둔 논이 두루미의 먹이터가 되고, 그곳에 찾아온 두루미를 보기 위해 다시 사람들이 철원을 찾는 구조. 한때 농경지 이용을 제한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두루미가, 이제는 지역의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는 셈이다.
이규호 한국 WWF 생물다양성팀 팀장은 “단순히 두루미에게 먹이와 잠자리를 준다는 것을 넘어, 자연보호 활동이 지역주민들과 상생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지속적으로 주민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루미 서식지 조성에 힘쓸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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