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로 몸을 던진 불꽃, 찰나의 붉은 궤적

경남 함안 무진정 앞 ‘함안 낙화놀이’ 재현

안녕 빌던 조선 때 전통, 이젠 관광 자원으로

폭음 대신 여백, 어둠과 물속에 스미는 여운

경남 함안군 무진정에서 열린 ‘2026 함안 낙화놀이 재팬 스페셜데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경남 함안군 무진정에서 열린 ‘2026 함안 낙화놀이 재팬 스페셜데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헤럴드경제(함안)=김명상 기자] 뜨거운 불티가 물 한가운데로 흩날리며 떨어진다. 빛과 어둠이 부딪히기 직전, 일렁이는 수면 위로 무수한 빛의 결이 펼쳐진다.

어둠을 배경 삼아 춤추듯 번지는 붉은 선들, 제 몸을 태워 없애는 순간에야 검은 숯가루는 가장 눈 부신 빛을 뿜어낸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스러지는 불꽃은 사람들의 욕심을 비웃듯, ‘타닥’하는 짧은소리만 남기고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바다 건너 함안까지, 불꽃 찾아온 사람들

경남 함안군 무진정에서 열린 ‘2026 함안낙화놀이 재팬 스페셜 데이’를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 [한국관광공사 제공]
경남 함안군 무진정에서 열린 ‘2026 함안낙화놀이 재팬 스페셜 데이’를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 [한국관광공사 제공]

가을 초입의 경남 함안군. 가을이 깊어지는 무진정(無盡亭) 앞 연못은 관람객으로 붐볐다. 무진정은 조선시대 문신 조삼이 1542년 후진을 양성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세운 정자다. 연못 위를 가로지른 줄에는 수천 개의 낙화봉이 매달려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다. 불꽃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분위기는 차분했다.

현장 곳곳에서는 외국어 안내 방송과 진행 요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날 연못가를 채운 관람객 중 1500명은 ‘2026 함안낙화놀이 재팬 스페셜 데이’에 참석한 일본인 관광객이었다. 야외 부스에는 온통 일본어 안내문이 쓰여 있어서 마치 일본 여행을 온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현장에서 만난 한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 드라마를 보고 서울과 부산을 다녀왔는데, 다른 지역 문화에도 관심이 생겼다”며 “일본인 여행 유튜버의 영상으로 봤던 함안 낙화놀이를 접하고 꼭 와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화약 없는 순수 숯가루, 함안의 고집

경남 함안군 무진정에서 열린 ‘2026 함안 낙화놀이 재팬 스페셜데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경남 함안군 무진정에서 열린 ‘2026 함안 낙화놀이 재팬 스페셜데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한국관광공사 제공]

함안 낙화놀이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 선조 때 함안군수 정구가 군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부처님오신날에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옛 문헌 ‘함안총쇄록’을 보면 1890년과 1892년 사월 초파일 읍성 전역에서 낙화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정책으로 전승이 중단됐던 낙화놀이는 광복 후 주민들의 손에서 되살아났다. 1960년 괴항마을 청년회가 사월 초파일 무진정에서 낙화놀이를 재연했고, 이후 비정기적으로 이어지다 1985년 함안군과 함안문화원의 지원을 받으며 정례화됐다. 2008년엔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으며, 지난해에는 ‘2025 한국관광의 별’ 지역특화 콘텐츠 부문에 선정됐다.

함안 낙화놀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김명상 기자]
함안 낙화놀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김명상 기자]

한자로 ‘떨어질 낙(落)’에 ‘불 화(火)’ 자를 쓰는 명칭 그대로, 함안 낙화놀이는 화약의 순간적 폭발력이 아닌 숯의 완만한 연소가 핵심 원리다. 수면 위 3m 정도 높이에 매달린 낙화봉은 약 2시간 동안 끊임없이 불씨를 털어내며 관람객의 눈을 홀린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따라 불티가 휘어지는 각도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자연과 기후에 따른 공기의 흐름에 불줄기는 매 순간 다른 무늬를 허공에 아로새긴다.

축제에는 지역 공동체의 오랜 기술과 지혜가 집약돼 있다. 1회 행사에 연못 위로 매다는 낙화봉이 보통 2500~3000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행사를 앞두고 함안 낙화놀이 보존 회원들과 괴항마을 주민들이 모여 수천 개의 봉을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낸다.

함안 낙화놀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김명상 기자]
함안 낙화놀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김명상 기자]

재료를 마련하는 일부터 낙화봉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은 만만치 않다. 마을 뒷산에서 간벌한 참나무를 전통 방식으로 구워 숯을 만들고, 이를 곱게 빻아 숯가루를 얻는다. 이어 한지에 숯가루를 담고 가운데 광목 심지를 놓은 뒤 꽈배기처럼 말아 꼰다. 관건은 강약 조절이다. 너무 느슨하면 불이 한꺼번에 타오르고, 지나치게 조이면 타다 꺼지는 만큼 숙련된 손길이 필요하다.

전국 전통 낙화놀이 중 화약, 소금, 유황, 쑥가루 등 부재료를 섞지 않고 순수 참나무 숯가루만 고집하는 곳은 함안이 유일하다. 부재료가 없어 불꽃이 지나치게 튀지 않고 은은하며, 연기와 자극적인 냄새 없이 타들어 간다.

장대 흔들리자 붉은 비 쏟아지며 탄성 터져

낮 동안 함안 낙화놀이를 준비하는 관계자들 [김명상 기자]
낮 동안 함안 낙화놀이를 준비하는 관계자들 [김명상 기자]

축제 시작 전, 흰색 전통 복식을 갖춘 사공들이 연못 위로 나룻배를 띄운다. 삿대를 밀어 연못 중앙으로 나아간 이들이 횃불을 들어 낙화봉 끝에 불씨를 댕겼다. 연못을 가로지른 줄 아래로 불길이 옮겨붙자, 한지에 싸인 공중의 심지들이 속으로 열을 품으며 서서히 붉은빛을 띠었다. 하나둘 피어오른 불씨는 연못 위에 하늘하늘 떨어져 나갔다. 어둠이 찾아오자 오직 수천 개의 붉은 점들만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이날 무진정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한국 전통 악기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나라’와 같은 한국 정서를 담은 음악부터,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배경 음악)까지 서정적인 멜로디를 담은 피리와 해금의 선율이 물결을 타고 서서히 번졌다.

낙화봉이 걸린 줄을 강하게 치는 ‘줄치기’ 후 쏟아지는 불씨가 만드는 불꽃비 [김명상 기자]
낙화봉이 걸린 줄을 강하게 치는 ‘줄치기’ 후 쏟아지는 불씨가 만드는 불꽃비 [김명상 기자]

음악이 이어지는 동안 벌게진 숯가루가 타닥타닥 마른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제 몸을 태워 밤을 밝히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처연하기도 했다. 현장을 찾은 한 60대 일본인 관광객은 “한국의 전통 불꽃놀이를 직접 눈으로 보니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며 “일본에 돌아가면 지인들에게 이 행사를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축제의 정점은 ‘줄치기’ 순간이었다. 진행자들이 긴 장대로 낙화봉이 매달린 줄을 힘껏 치자, 진동을 타고 불티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꽃잎처럼 흩날리던 불꽃은 이내 붉은 폭포가 돼 연못 위로 떨어졌다. 관람석에선 “와!”하는 탄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낙화(落火)라는 표현을 대신할 말을 찾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차가운 물과 뜨거운 불, 어둠 속에 스미다

함안 낙화놀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김명상 기자]
함안 낙화놀이에서 낙화봉에 불을 붙이는 모습 [김명상 기자]

이날 무진정의 연못은 불꽃을 반영하는 거울이 됐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붉은 궤적이 수면에 고스란히 비쳐, 물속에서도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뜨거운 불이 차가운 물에 안기는 모습은 충돌이라기보다 서로에게 스며드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적인 미학은 보는 이에게 정서적 위안을 준다. 귀를 때리는 폭음이나 눈부신 섬광 대신, 어둠과 어우러진 은은한 불빛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순간의 자극을 좇기보다 불꽃이 피어나고 스러지는 모습을 차분히 바라보는 시간. 타오르는 불꽃의 명멸은 마치 한국적인 여백의 미를 응축한 장면인 듯 보인다.

떨어지는 불꽃과 주변 조명이 반사되어 장관을 이룬 경남 함안군 무진정 [한국관광공사 제공]
떨어지는 불꽃과 주변 조명이 반사되어 장관을 이룬 경남 함안군 무진정 [한국관광공사 제공]

밤이 깊어지자 연못 위의 불꽃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던 궤적은 한층 가늘어졌고, 수면은 본래의 검은 고요를 되찾아갔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남아 있었다. 수백 년 동안 한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빌며 매달았던 투박한 숯가루는 그렇게 바다 건너 이방인들의 가슴속까지 깊은 여운을 남긴 채, 가을을 재촉하며 고요히 사라져 갔다.


terry@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