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하나하나 씻고 말려서 내놨는데...”
우유나 두유를 다 마시고 남은 빈 종이팩. 재활용을 위해 물로 깨끗하게 헹구고, 안쪽까지 말린 뒤 분리배출하는 게 상식이다.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기꺼이 수고를 들인다. 환경을 지키고, 올바른 분리배출 방법을 지키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이 과정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종이팩을 택배 상자와 같이 ‘종이류’로 버리거나 재활용 봉투에 넣는 경우가 많기 때문.
엄밀히 보면, 종이팩은 ‘종이류’가 아니다. 내부에 별도의 비닐 코팅이 돼 있어 선별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위한 별도 체계가 마련돼 있는 경우는 드물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종이팩 재활용률은 단 10%대에 머물고 있다. 국민들의 수고에 비해, 재활용 실적이 현저히 낮은 셈.
지적이 이어지자 정부까지 나섰다. 이달부터 전국 대형 아파트를 중심으로 종이팩을 따로 모으는 분리배출체계를 도입하기 시작한 것. 다만 실제 재활용률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종이팩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택배 상자나 신문지와는 다르다. 내용물이 새지 않도록 종이 안쪽에 폴리에틸렌(PE) 등 플라스틱 소재로 코팅 처리가 돼 있다.
당연히 재활용하는 방법도 일반 폐지와 다르다. 종이팩만 따로 모아 전용 공정을 거쳐야 내부의 종이 원료를 제대로 회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종이팩 자체가 재활용하기 어려운 저품질 자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종이팩에는 품질이 우수한 천연펄프가 사용돼 화장지나 종이타월 등 다양한 제품의 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제대로 수거하기만 하면 충분히 귀한 자원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반 폐지와 섞여 배출되는 탓에 재활용되지 못하고 소각되는 물량이 적지 않다.
여기서 복병은 따로 있다. 바로 ‘멸균팩’이다. 일반적으로 냉장 보관하는 우유 등에 사용되는 종이팩과 달리, 멸균팩은 종이와 비닐뿐 아니라 알루미늄까지 여러 겹으로 접합해 만든다.
종이팩 안쪽을 살펴보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일반 우유팩의 내부는 흰색에 가깝지만, 멸균팩은 알루미늄층으로 인해 은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구조는 내용물을 빛과 산소로부터 보호해 오랜 기간 상온에서 보관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재활용 과정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일반 종이팩과 달리 알루미늄층까지 분리해야 하는 만큼, 처리 과정이 더욱 까다롭기 때문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올해 1월 공개한 자원순환 분야 업무계획 관련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24년 국내에서 출고·수입된 멸균팩은 총 3만683t에 달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실제 재활용된 물량은 926t에 불과했다. 전체의 약 3% 수준이다.
일반 우유팩까지 포함한 종이팩 전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종이팩 재활용률은 약 14%에 그쳤다. 지난 2014년 26%에 달했던 재활용률이 10년 만에 절반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재활용률이 낮은 걸까. 우선 시민들의 분리배출 인식부터 문제로 꼽힌다.
지난해 9월 서울환경연합이 전국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멸균팩 재활용 인식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42.7%가 멸균팩과 일반 종이팩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버린다고 답했다.
두 종류의 종이팩을 별도로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비중은 33%에 불과했다. 심지어 올바른 배출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멸균팩의 배출 방법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7.5%는 일반 ‘종이류’로 분리배출해야 한다고 답했다.
종량제봉투에 버린다는 비중도 25%를 넘어섰다. 당시 종이팩 전용 수거함에 배출한다고 답한 비중은 24%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를 시민들의 무관심이나 인식 부족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애초에 종이팩을 따로 버릴 수 있는 수거체계부터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는 종이류와 플라스틱, 캔 등을 구분하는 수거함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종이팩만 따로 버릴 수 있는 전용 수거함은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다. 배출을 위해 주민센터나 별도로 마련된 수거 거점을 직접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 재활용품과 함께 수거된 종이팩이 모두 재활용되는 것도 아니다. 올해 6월 자원순환단체 ‘지구를지키는소소한행동’이 공개한 ‘서울시 공공선별장 종이팩 회수·선별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25개 자치구의 종이팩 공공선별량은 총 481.67t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 가운데 6개 자치구에서는 공공선별장을 통해 선별된 종이팩 물량이 아예 ‘0t’에 그쳤다. 별도 선별을 위한 지침이나 시설도 미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 25개 자치구 중 15곳(60%)은 분리배출 지침에 종이팩을 별도 품목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아무리 열심히 종이팩을 씻고 말려 배출하더라도, 실제 수거·선별 과정에서 이를 별도로 처리할 수 없다면 재활용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셈이다.
이에 정부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인 수거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져 왔다. 실제 변화도 이뤄지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1일부터 전국 의무관리 대상 공동주택 약 14만4000개 동을 중심으로 종이팩 별도 분리배출을 자율·선제 시행하고 있다.
300세대 이상 아파트 등 일정 규모 이상의 공동주택에서 종이팩을 일반 폐지와 구분해 따로 모으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정부는 관련 지침 개정을 통해 내년 1월 1일부터 이를 의무화할 계획이다.
수거 이후 재활용 과정에 대한 개선도 추진한다. 앞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달 21일 종이팩 생산·재활용 관련 기업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생산업체가 회수·선별·재활용 비용을 분담하고, 재활용업계는 별도로 모인 종이팩을 고품질 재생원료와 재활용제품으로 생산하는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별도 분리배출을 의무화한다고 해서 재활용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종이팩을 따로 모으더라도 수거 과정에서 다른 폐기물과 다시 섞이거나, 선별시설에서 제대로 분리하지 못한다면 실질적인 개선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재활용률이 3%에 불과한 멸균팩의 경우, 별도 회수체계는 물론 수거된 원료를 안정적으로 처리할 재활용시설과 수요처까지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정부가 생산·수거·재활용 과정 전반의 개선에 나섰지만, 현장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종이팩 재활용체계 개선 업무협약 당시 “종이팩 재활용체계가 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종이팩 분리배출 체계 구축 등 제도적 기반 마련과 정책적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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