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아버지 뒤 이은 ‘정치 금수저’
21세 정계 입문해 올해 대선 도전
온건파지만 ‘브라질 트럼프’ 노선 계승
고물가·재정 악화 업고 룰라 맹추격
1차 투표서 3선 현역 꺾고 1위 이변
부패·돈세탁·부친 사면 등은 약점
25일 결선서 남미 ‘블루 타이드’ 향방 관심
천문학적인 돈을 주무르는 기업인, 말 한 마디에 주가가 출렁이는 금융인, 미래를 바꾸는 창업가, 국제 정세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지도자. [더 비저너리]는 헤럴드경제 국제부가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파워 리더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무엇이 현재의 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생생한 스토리를 전해 드립니다.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보우소나루 ‘정치 왕조(dynasty)’가 세력을 확대했다.”
지난 4일 치러진 브라질 대선 1차 투표에서 플라비우 보우소나루 후보(45·상원의원)가 ‘깜짝 1위’를 차지한 데다,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71) 일가가 대거 당선되자 APF통신이 내린 평가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세 번째 부인인 미셸 여사(44)는 행정 수도 브라질리아가 있는 연방 지역구 상원의원에, 동생인 헤나투(62)는 상파울루주 히원의원에 당선됐다. 자이르의 차남 카를루스(44)는 ‘보수 텃밭’인 남동부 산타카타리나주에서 상원의원직을 달았고, 4남 자이르 헤난(28)은 산타카타리나주 하원의원이 됐다.
일가의 약진은 ‘정치 왕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주간지 슈테른은 1일 ‘보우소나루 일가 앞에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일가도 점잖은 것처럼 보인다’는 기사를 실었다. 보우소나루 일가가 전 대통령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정치를 ‘가족사업’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슈테른은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은 ‘보우소나루’는 미성년자인 15세 딸 라우라뿐”이라고 꼬집었다. ‘피선거권을 획득한 보우소나루’는 으레 선거에 출마했다.
‘보우소나루 왕조’의 시작인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거침없는 화법으로 주목받아 변방의 국회의원에서 2018년 자유당의 대선후보로 몸집을 키웠고, 강경한 치안 정책, 반부패 및 기존 정치권 비판, 사회적 보수주의를 내세워 당선됐다. 그러나 ‘브라질의 트럼프’라 불릴 정도로 강경한 우파 정책을 내세웠던 보우소나루도 경제나 반부패 등의 현안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못 내자, 2022년 다시 민심은 노동당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후보에게 기울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2022년 대선에서 패배 뒤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아, 현재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는 그의 장남 플라비우가 ‘대신’ 출마한 셈이다. ‘대타’ 정도로 여겨졌던 플라비우는 예상 밖 선전을 펼쳤다. 가파르게 지지율을 높여간 그는 이번 대선에서 47%를 득표, 좌파 성향의 룰라(45%) 현 대통령을 근소하게 앞섰다. 두 사람은 오는 25일 결선투표에서 다시 맞붙는다. 결선 투표의 결과에 따라, 룰라 대통령과 남미 대륙 좌파진영의 향방이 결정되게 된다.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가 브라질 결선 투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다.
부친 쏙 빼다박은 ‘정치적 후계자’, 21세 정계 입문
플라비우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5남 중 장남으로, 한 눈에 부자지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부친의 젊은 시절을 빼닮았다.
플라비우는 1981년 4월 야굴랴스 네그라스 육군 사관학교가 있는 리우데자네이루주 헤젠지에서 당시 육군 장교였던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아들로 태어나, 20세에 브라질 진보당에 입당했고, 선거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21세였던 2002년 리우데자네이루주 의원에 당선됐으며, 37세에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아버지처럼 거침없고 선동적인 스타일은 아니지만 노선은 강경하다. 강경 우파 인사인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의 치안 정책을 높이 평가하며 “브라질에도 아주 많은 교도소를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브라질 군사독재시기를 공개 옹호하며 “군사정권은 민주주의 후퇴기가 아니라 이행기였을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사형제 부활과 촉법소년 연령 16세 하향에도 찬성한다.
그는 수감 중인 아버지가 후계자로 지명하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고, 이전에 대권 야심을 공개한 적도 없다.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좀 더 온건한 보우소나루”로 소개하면서 아버지를 “나의 나침반이자 기준점”이라고 말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유세에서는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은 안다”라며 “하지만 펠레의 아들을 펠레와 비교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중도층까지 외연을 확장하려는 욕심이 엿보인다.
보우소나루 후보는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을 즐기며, 아마존 주권을 강조할 때는 “아마존은 우리의 것”, 농민 표심을 공략할 때는 “농업은 위대하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는다. 가족적 가치를 중시하기도 한다. 한 선거영상에서 치과의사인 아내 페르난다는 플라비우가 아버지보다 온화해진 건 자신의 공이라며 “내가 그를 다시 교육시켰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두 딸의 아버지이도 한 그는 가정적인 이미지도 적극 부각한다.
그는 소셜미디어에서 인공지능(AI)으로 제작한 선거 광고도 적극 활용한다. 비행복과 조종사용 선글라스 차림으로 전투기를 몰며 임무를 수행하거나,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보트에 탄 마약 밀매범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장면도 나온다. 정치분석가 토머스 트라우만은 “아버지와 비교하면 플라비우는 더 상냥하고 친근한 인물”이라면서도 “그렇다고 이념적으로 극우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당선되면 아버지 사면할 것” 부친 후광 집착에 비리까지
플라비우는 아버지의 후계자임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는 만큼, 대선 승리 이후 그의 노선을 충실히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강력범죄 척결, 정부 기능 축소, 트럼프 행정부와의 밀착이 그의 핵심 공약이다.
아버지의 정치적 명예 회복도 그의 중요한 ‘과업’이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보우소나루 후보는 지난 4일 1차 투표에서 1위를 확정한 후 취재진에게 “브라질이 변화를 원한다는 것을 확인해 기쁘다”라며 룰라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끝내자고 주장했다. 집권하면 쿠데타 모의 혐의로 27년형을 선고받고 가택연금 중인 부친을 사면하겠다고도 밝혔다.
아버지를 빛내려는 지나친 욕심이 부패 및 비리로 번지기도 했다. 그는 지난달 아버지를 다룬 전기 영화 ‘다크 호스’의 자금 조달과 관련해 부패와 돈세탁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영화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사기 사건으로 수감된 은행가 다니엘 보르카루가 제작비 2400만달러 중 절반이 넘는 1220만달러(약 163억6000만원)를 댔다. 의회 예산이 일부 들어갔다는 의혹도 있다. 현재 수사중인 이번 사건에서 플라비우와 에두아르두 등 자이르 보우소나루의 아들들이 제작비 투자 대가로 보르카루에게 사면 등 정치적 대가를 약속했는지가 의혹의 핵심이다. 플라비우는 보르카루와 접촉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수사 자료가 유출돼 사실로 드러나자 혐의를 모두 인정했다.
플라비우는 계모인 미셸 전 영부인과도 갈등을 빚었다. 미셸은 인스타그램 영상에서 플라비우가 자신을 “무시하고 부당하게 대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플라비우의 공개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플라비우의 유세에는 한 차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치 금수저’의 반란, ‘경제 심판론’이 도와줄까
플라비우가 대선 출사표를 냈을 때만 해도 이 정도로 그가 약진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상대는 3선의 현역 대통령. 지난 5월만 해도 룰라의 지지율이 40%, 플라비우는 31% 정도였다.
그러나 우파 진영의 지지율이 그에게 집중되면서 지난 6월부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더니, 1차 투표에서는 룰라를 2%포인트 차이로 앞서는 이변을 연출했다.
고물가와 정부 재정 악화 등으로 인한 ‘심판론’도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룰라 대통령의 세 번째 집권이 시작된 2023년부터 현재까지 연간 소비자물가는 모두 5%에 육박해 중앙은행 목표치 3%를 웃돌았고, 총 공공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81.9%로 약 10%포인트 늘었다.
브라질은 ‘엘도라도’, 즉 황금의 땅으로 불린다. 석유와 식량, 핵심 광물이 품부하고 전력의 89%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한다. 풍부한 청정 전력은 데이터센터와 저탄소 산업을 유치할 자산이다. 미·중 경쟁이 심해질수록 브라질의 전략적 가치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자원만으로 다음 정부의 성공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높은 금리와 재정 부담, 부패 의혹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 ‘도전자’인 플라비우는 이를 비판하는 ‘심판론’의 덕을 봤지만, ‘승리자’가 되고 나면 그 심판론을 고스란히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그의 승리를 기정사실로 보기도 어렵다. 룰라 대통령은 농촌 지역과 노조 등을 중심으로 탄탄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다. 이번 1차 투표에서 ‘예상 밖 패배’를 당한 만큼 결선 투표에서는 지지층이 더 강하게 결집할 수 있다. 룰라 대통령 역시 “나는 녹아웃(KO) 무대에서 강하다”며 승리를 자신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4일 브라질의 다음 대통령이 “복수심에 찬 금수저 2세 아니면 노쇠한 좌파”가 될 것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누가 이기든 풍부한 자원을 성장으로 연결할 정치적 역량이 부족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보우소나루 약진에 ‘블루 타이드’ 마지막 퍼즐 완성 기대하는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이 브라질 대선 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지도 관심이다. 브라질 대선은 아메리카 대륙 국가 우파 정상들의 기대가 한 데 모인 행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집권 때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과 가까웠고, 플라비우도 지난 5월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비공개로 만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무죄와 석방을 요구하는 글도 수차례 올렸다. 친트럼프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지난 7월 선거 출정식에 참석해 지지를 보냈다.
우파의 집권이 늘어나면서 ‘핑크 타이드’(좌파 집권 물결)에서 ‘블루 타이드’(연이은 우파 집권)로 변모하는 미 대륙에서, 브라질은 굳건히 좌파 정권을 유지해온 ‘좌파 좌장 국가’였다. 이번에 플라비우가 정권 탈환에 성공하면 중남미 대륙에서 좌파 정권은 멕시코(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만 남는다. 남미 대륙을 완전히 푸른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스페인 EFE통신은 브라질을 트럼프가 지원하는 중남미 우경화의 ‘마지막 조각’으로 묘사했다. 보우소나루 후보는 당선되면 미국 주도의 지역 안보 협력체인 ‘미주 방패’에 참여하겠다고 밝혔고, 지난해에는 SNS에서 브라질에 대한 미군 개입까지 환영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중남미 정치에 적극 개입해왔다. 브라질도 예외가 아니어서 트럼프 행정부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기소를 중단시키려 브라질에 관세를 부과하고 연방대법원 핵심 대법관을 제재했으며 고위 당국자 여러 명의 비자도 취소했다.
그러나 이 같은 압박이 ‘외세 개입’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부르는 역효과를 낸 것으로 판단된다. 룰라 대통령은 외국의 “내정 개입”을 반복해 비판했고, 이를 선거의 핵심 의제로도 삼았다. 그는 “브라질은 브라질인의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자국의 주권을 수호하겠다는 메시지를 냈다.
이에 백악관은 브라질 결선 투표를 앞두고 침묵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비우 후보가 룰라를 앞서는 성과를 냈음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SNS에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조용했다. 한 백악관 참모는 “지지선언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면 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라며 이 침묵이 브라질의 격렬한 선거 상황을 고려한 전략적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브라질이 남미 블루 타이드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될 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mokiya@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