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닐 전구체 수출하던 中 업체
美 추적에 펩타이드로 ‘갈아타기’
과자로 속여 대용량 들여온뒤 소분 판매
가상화폐 결제액 월 1000만달러 넘어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미국 마약 카르텔에 펜타닐 원료를 공급해 온 중국 화학업체들이 이제는 피부 태닝, 조직 재생, 체중 감량을 내세운 ‘펩타이드’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 6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업체들의 광고와 가상화폐 결제 추적 업체들의 분석을 토대로 이같이 보도했다.
일부 업체는 펜타닐 유통에 관여한 혐의로 이미 미국에서 기소됐다. 하지만 이들은 고품질 원료와 엄격한 품질 관리를 하고 있다고 광고한다.
가상화폐 분석업체 TRM랩스는 펜타닐 전구체를 판 업체 200여곳을 추적해 왔는데, 이 가운데 최소 50곳이 현재 펩타이드를 판매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몇 달 새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다. 추적된 가상화폐 결제 내역을 보면 구매국은 미국 등이다.
시장에서 ‘펩타이드’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이 물질은 대부분 미승인 의약품이다. 대형 제약사들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중국 등지의 암시장 업체들이 시장을 넓히고 있다. 이들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승인한 펩타이드 계열 약물, 이를테면 위고비 같은 GLP-1 비만약의 가짜 버전을 훨씬 싼 값에 팔며 정식 제약사와도 경쟁하고 있다.
TRM랩스의 알로이스 아필리포아이 선임 블록체인 분석가는 “이들은 지구상에 알려진 모든 물질을 만들 노하우와 설비를 갖고 있다”며 “요즘 펩타이드 수요가 많으니 펩타이드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가 중국 안후런청과기다. 2023년 미 법무부는 이 업체가 시날로아 카르텔 등 멕시코 마약 조직이 쓴 펜타닐 전구체를 공급했다며 기소했다. 이 업체는 현재 웹사이트에서 태닝 효과로 알려진 펩타이드 ‘멜라노틴Ⅱ’와 오젬픽(노보 노디스크가 개발한 GLP-1 계열 비만약)의 주성분인 세마글루타이드를 염(salt) 형태로 팔고 있다. 공소장에는 이 업체 화학자들이 구매자에게 펜타닐 제조법까지 알려줬다는 내용이 담겼다.
펩타이드는 아미노산이 짧게 연결된 물질로, 몸속에서 성장호르몬 분비나 조직 재생 같은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엄밀히는 인슐린, 오젬픽 같은 FDA 승인 약물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지만, 최근에는 주로 FDA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사람들이 직접 주사하는 물질을 펩타이드로 통칭하고 있다.
WSJ은 GLP-1 계열 비만약의 극적인 감량 효과를 본 소비자들 사이에서 다른 물질도 주사해 보려는 관심이 커졌다고 전했다. 효능은 대부분 입소문 수준이지만 인플루언서, 팟캐스터, 대체의학 의사들이 추천했으며,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도 “열렬한 팬”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부 메드스파(미용·의료 복합시설)와 원격진료 업체, 대체의학 의사가 환자에게 미승인 펩타이드를 공급하기도 하지만, 상당수 미국인들은 온라인 판매처에서 직접 주문한다. 제품에는 대개 ‘연구용’, ‘인체 섭취 불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가루 형태여서 정균수로 녹여 주사해야 하며, 소량씩 소분한 약병으로 팔기도 하고, 대리상이나 재판매업자가 원료를 녹여 바로 쓸 수 있는 형태로 파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용자들이 공급업체 정보를 주고받는데, 일부 미국 구매자는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중국 업체를 찾았다고 WSJ에 말했다.
비영리 공공보건 단체 ‘안전한 의약품 협회’의 샤비르 임버 사프다르 사무총장은 “보건 허위 정보가 넘치고 기관에 대한 불신이 큰 시대에 사람들은 FDA 규제·검사 체계가 주는 경고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미 보건복지부는 “FDA는 펩타이드로 판매되는 제품을 포함한 미승인 의약품이 미국 소비자에게 팔리는 것을 우려한다”는 입장이다.
중국 업체들은 오래전부터 펜타닐 제조에 쓰이는 화학 원료의 주요 공급처였다. 펩타이드처럼 이 원료들도 온라인에서 공공연히 팔렸고, 구매자에는 펜타닐을 만들어 미국 전역에 유통한 카르텔이 포함돼 있었다. 미국은 수년간 중국에 단속을 요구했고, 중국 당국도 판매업체 폐쇄와 수출 통제에 나섰지만 상당수 업체는 살아남았다.
가상화폐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는 보고서에서 “국제 사법당국의 압박이 커지자 일부 중국 화학업체가 펩타이드 시장을 수익성이 높고 법적으로 모호한 다음 타깃으로 인식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 업체에 따르면 2025년 이전만 해도 회색시장 펩타이드의 가상화폐 결제액은 월평균 20만달러(약 2억6000만원) 수준의 지하 시장이었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커지기 시작해 올해는 월 1000만달러(약 133억 8000만원)를 넘어섰다.
유통 방식도 펜타닐 전구체와 닮았다. 중국 펩타이드는 상당수가 ‘마스터 카턴’이라는 밀수 수법으로 미국에 들어온다. 미국 구매자들의 주문을 받아 여러 건을 큰 상자 하나에 합쳐 담고, 이 상자를 과자 같은 합법 상품으로 허위 표기해 들여온 뒤 미국 내 조력자가 개별 포장을 나눠 배송한다. 구매자는 자신이 산 펩타이드가 중국산인지 모를 수도 있다.
지난해 12월 미 세관국경보호국(CBP) 신시내티 지부는 중국 발송업체의 마스터 카턴 수법을 처음 적발했다. 이후 약 400건의 시도를 막았고, 여기에는 펩타이드 라벨이 이미 붙은 약 6000건의 배송분이 포함됐다. 전국적으로도 불법 의약품 적발이 급증했다. CBP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규정 위반·위조 제품 압수가 2400건을 넘었고, 약병 수는 13만 개 이상이다.
mokiya@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