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수사반장’ 4인방 모두 별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자네들이 보고 싶어서 그런지 잠이 잘 안 온다.”
2024년 5월 18일 방송된 MBC 드라마 ‘수사반장 1958’ 최종회. 백발의 박영한(최불암 분)이 지팡이를 짚고 먼저 떠난 동료들의 묘를 찾았다. 비석마다 꽃을 한 송이씩 놓고 김 형사, 조 형사, 서 형사, 남 형사를 차례로 불렀다. 원작에서 최불암과 호흡을 맞춘 네 동료 배우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남성훈이 연기한 배역이다. 네 사람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해가 기울 무렵 노(老)형사는 거수경례를 올리고, 늘 하던 “충성” 대신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그로부터 2년 반, 그날의 한 마디는 배우 최불암이 시청자에게 남긴 작별 인사가 됐다.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이 지난 29일 오후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별세했다. 향년 87세. 1939년생(호적상 1940년생)인 고인은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14년간 진행해 온 KBS 1TV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재활에 전념했으나 건강이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불암의 별세로 MBC ‘수사반장’의 형사 4인방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시청자들은 박 반장 역의 최불암과 김 형사 역의 김상순, 조 형사 역의 조경환, 남 형사 역의 남성훈을 4인방으로 기억한다. 다만 남성훈은 원년 멤버인 서 형사 역의 김호정이 1978년 세상을 떠난 뒤 합류했다. 18년 동안 최불암 곁에는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남성훈 네 동료가 있었던 셈이다. 네 사람은 차례로 길을 떠났고, 마지막까지 홀로 남아 있던 최불암도 김상순을 떠나보낸 지 11년 만에 동료들의 곁으로 향했다.
국민드라마 ‘수사반장’…최불암의 인생작
‘수사반장’은 1971년 3월 6일 첫 전파를 타 1989년 10월 12일까지 18년간 880회 방송된 한국형 수사 드라마의 대표작이다. 최고 시청률은 70%를 넘나들었다. 강력범 870여 명을 검거한 최중락 전 총경이 자문을 맡아 실제 사건을 극으로 옮겼고, 윤영남이 작곡하고 재즈 타악기 연주자 류복성이 연주한 시그널 음악은 방송 시작을 알리는 안방극장의 신호음이 됐다.
이 드라마엔 늘 사람이 있었다. 범인에게도 사연을 허락하는 시선, 가난과 욕망이 범죄로 번지는 산업화 시대의 그늘이 매회 화면에 담겼다. 최불암은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기 비결을 두고 “수사물 이전에 휴머니즘이 담긴 사회고발 드라마였기 때문”이라고 돌아봤다.
최불암은 ‘수사반장’을 평생의 ‘인생작’으로 꼽는다. 2007년 펴낸 에세이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엔 시그널 음악만 들어도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고백이 실렸다. 그는 에세이에서 ‘수사반장’은 “내 연기를 다진 초석 같은 작품”으로, ‘전원일기’는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비상시켜 준 빛나는 날개”로 적었다. 경찰의 이미지를 끌어올린 공로로 1972년 처음 명예 경찰에 위촉된 최불암은 2024년 명예 치안정감(명예 국가수사본부장)에 올랐다.
박 반장은 첫 회부터 중후했다. 설정상 50대의 베테랑 수사반장이었지만, 1971년 배역을 맡은 최불암은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를 올려 입은 셈이다. 연극 무대에서 다진 호흡은 세월의 간극을 메웠다. 트렌치코트 자락을 여미고 담배를 문 채 사건 현장을 훑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한국의 콜롬보’라는 별명을 붙였다. 호통을 치기보단 낮은 목소리로 범인의 사연을 끌어내는 쪽이었다. 범인을 법정으로 보내면서도 그 뒤에 서 있던 시대의 그늘을 함께 들여다본 연기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가 길어진다”는 대사가 지금까지 회자하는 까닭이다.
김 형사 역의 김상순은 박 반장 곁의 맏형이었다. 1937년생으로 최불암보다 나이가 많았다. 연극배우와 성우로 경력을 쌓은 뒤 1963년 KBS 공채 탤런트 3기로 데뷔했다. 마이크 앞에서 단련한 목소리는 김 형사의 묵직한 무게가 됐다. 강직하면서도 사람 좋은 웃음을 감추지 않는 수사관, 반장의 방침을 현장에서 묵묵히 구현하는 실무형 형사의 얼굴이었다. ‘수사반장’ 이후에도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신돈’, ‘연개소문’을 오가며 시대극과 현대극에서 고루 깊은 조연의 자리를 지켰다.
조 형사 역의 조경환은 화면을 채우는 거구였다. 1945년생으로 한양대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1969년 MBC 공채 탤런트 1기로 연기를 시작했다. 범인을 제압하는 강인한 조 형사로 이름을 알렸지만, 남은 평가는 우악함보다 균형에 가깝다. 상대 배우를 받쳐 주는 버팀목 같은 연기는 훗날 ‘호랑이 선생님’의 따뜻한 교사, ‘종합병원’과 ‘모래시계’, ‘대장금’과 ‘이산’의 선 굵은 인물로 이어졌다.
남 형사 역의 남성훈은 김호정의 빈자리를 채우며 가장 늦게 팀에 합류했다. 1968년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수려한 외모의 청춘스타로 먼저 이름을 알린 배우였다. 중후한 반장과 두 선배 형사 사이에서 남성훈은 도시적이고 날렵한 수사관의 결을 더했다. 평균 연령이 올라가던 팀에 새로운 속도가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사랑과 야망’, ‘모래시계’, ‘목욕탕집 남자들’로 이어진 이력은 멜로와 정통극을 오간 배우의 폭을 보여준다.
이들의 첫 이별은 방송이 한창이던 1978년 8월에 찾아왔다. 서 형사 역의 김호정이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24년 뒤인 2002년 10월에는 남성훈이 57세로, 다시 10년 뒤인 2012년 10월에는 조경환이 간암 말기 판정 두 달 만에 67세로 눈을 감았다. 그해 12월 30일 열린 ‘MBC 연기대상’은 조경환에게 공로상을 추서, 트로피를 대신 받으러 무대에 오른 사람은 최불암이었다. 그는 “경환아 나다. 네가 이 자리에 서서 이 상을 받아야 하는데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객석에 온 고인의 딸을 언급한 뒤에는 “기뻐해라”라는 말로 소감을 맺었다.
2015년 8월 25일 김상순이 폐암 투병 끝에 78세로 별세하며 원작에서 최불암과 호흡을 맞춘 네 동료는 모두 세상을 떠났다. 18년 동안 한 화면을 지킨 수사반에는 반장 한 사람만 남았다.
최불암은 상을 받는 자리에서도 먼저 떠난 동료들을 잊지 않았다. 2022년 10월 8일 경남 진주에서 열린 코리아드라마어워즈에서 공로상을 받은 최불암은 소감 끝에 동료들을 불렀다. “이러한 상을 받을 때는 동지들을 생각합니다. 하늘에 계신 동지들에게 이 상을 바치고 싶습니다. 어이, 이 상 받아!”
1958년의 청년 박영한, 원작의 이름들을 불러내다
MBC가 기획한 프리퀄은 박 반장이 ‘반장이 되기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수사반장 1963’이라는 가제로 출발한 기획은 ‘수사반장 1958’이라는 이름으로 2024년 4월 19일 첫선을 보였다. ‘열혈사제’의 박재범 작가가 크리에이터를, 김영신 작가가 극본을, 영화 ‘공조’의 김성훈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자유당 정권 말기 정치깡패가 거리를 활보하던 ‘야만의 시대’, 경기도 소도둑 검거율 1위 형사 박영한(이제훈 분)이 서울 종남경찰서로 옮겨 와 동료 셋과 한 팀이 되는 이야기다. 연출을 맡은 김성훈 감독은 첫 방송을 하루 앞둔 제작발표회에서 “‘수사반장’이 방송되던 그 시절 박영한은 실제 존재하는 것 같은 영웅이었다. 그렇다면 그 영웅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그것을 보여주는 게 프리퀘의 의미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최종회는 시청률 10.6%(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기록했다.
이들 간의 연결고리는 이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원작은 형사 배역에 배우들의 실명을 반영했다. 김상순·조경환·남성훈은 본명을 그대로 배역 이름으로 썼고, 김호정의 배역 이름은 서호정이었다. 프리퀄은 이 이름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김상순(이동휘 분), 조경환(최우성 분), 서호정(윤현수 분)이 박영한(이제훈 분)과 나란히 섰다. 1978년 세상을 떠난 김호정의 배역 서 형사까지 되살려 원작 초기 멤버의 짜임을 복원한 것이다. 남성훈의 배역은 종남서의 막내 순경 남성훈(도우 분)으로 이어졌다.
당시 제작발표회에서 이제훈은 대본 리딩 때 최불암 앞에서 젊은 박영한을 연기하려니 많이 떨렸다고 털어놨다. 최불암이 건넌 조언은 “박영한은 안에 화가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한마디였다. 이제훈은 외모를 닮거나 따라 하기보다 “정신과 마음을 계승하려 했다”고 했다. 특유의 “파하” 웃음소리도 때때로 극 중에 녹였다. 최불암의 박 반장이 완성된 형사였다면, 이제훈의 박영한은 불의 앞에서 분노하고 넘어지며 자라는 형사였다. 마지막 회, 유대천(최덕문 분) 반장에게서 수사 1반을 물려받으며 ‘박 반장’의 탄생을 알렸다.
두 시대를 잇는 매듭은 최불암 자신이었다. 1회는 은퇴한 노형사 박영한이 뒤를 이어 형사가 된 손자(이제훈 분)에게 간식과 갈아 신을 양말을 챙겨 경찰서를 찾는 장면으로 열렸다. 벽에 걸린 형사 시절 동료들과의 사진을 바라보던 눈빛이 1958년으로 장면을 넘긴다. 최종회의 박영한은 원작에서 범인 역으로 자주 출연한 배우 이계인, 송경철과 재회한 뒤 동료들의 묘비를 찾았다. 그 장면은 이제 연기가 아닌 작별로 남았다. 2024년 12월 30일 열린 ‘MBC 연기대상’에서 ‘수사반장 1958’은 올해의 드라마상을, 최불암은 공로상을 받았다. 같은 무대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이제훈은 이 작품을 택한 가장 큰 이유로 최불암을 꼽으며 다짐했다. “앞으로도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발자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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