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전쟁과 정치적 불안, 국가부채 증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세계 부유층이 실물 금을 보관할 국가를 바꾸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동의 고액 자산가들이 금괴를 싱가포르로 옮기면서 현지 초대형 금고의 보관 공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싱가포르의 은행과 귀금속 거래업체들이 해외 부유층의 금 보관 수요 증가에 대응해 시설과 관련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싱가포르 귀금속 거래업체 제이 로트바트 앤드 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싱가포르의 민간 금 보유량은 800톤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과 비교하면 약 16배 증가한 규모다. 증가분의 상당 부분은 유럽에서 유입됐으며 업체는 올해와 내년에도 보유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싱가포르의 패밀리오피스 파로캐피털 공동 창업자 마니시 티브레왈은 기존에 다른 국가에서 금을 보관하던 부유층 가문들이 보유량 일부를 싱가포르로 옮기고 있다고 전했다. 실물 금에 투자하지 않았던 가문들도 은행과 귀금속 거래업체를 통해 금을 구매한 뒤 싱가포르에 맡기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침대 밑에 은 보관하던 사업가, 이제 500톤 수용 금고 운영
싱가포르에서 금 보관 수요가 늘면서 대규모 보안시설을 운영하는 업체들의 사업도 성장하고 있다.
싱가포르 귀금속 보관업체 실버불리언의 창업자 그레고르 그레거슨은 약 17년 전 자신의 침대 밑에 소량의 은을 보관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동네 기차역에서 고객들과 만나 은을 거래하며 시장 수요를 확인했다.
독일 출신의 전직 은행 데이터 설계자인 그는 현재 6층짜리 초대형 금고 시설 ‘더 리저브(The Reserve)’를 운영하고 있다.
시설 면적은 약 1만6700㎡로 금 500톤을 보관할 수 있는 규모다. 은까지 포함하면 세계 연간 은 공급량의 약 30%에 해당하는 물량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업체의 금 보관 프로그램에 참여한 고객들의 보유량은 2020년 초 이후 3배 증가했다. 올해 9월 기준 약 8.6톤으로, 이 가운데 90%가량을 해외 고객이 소유하고 있다.
그레거슨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귀금속 매입이 급증하면서 기존 보관시설의 공간이 부족해지자 2024년 새 금고 건설을 앞당겼다.
싱가포르의 또 다른 대형 보관시설인 ‘르 프리포트(Le Freeport)’도 비슷한 상황이다.
‘아시아의 포트녹스’로 불리는 이 시설은 최소 1700톤의 금을 보관할 수 있다. 운영업체는 지난 5월 금 보관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지하 금고의 보관 공간이 거의 찼다고 밝혔다.
싱가포르의 두 대형 민간 금고가 수용할 수 있는 금은 합계 최소 2200톤에 이른다.
스위스에 맡겼던 금도 싱가포르로…미국 부유층 문의 3배 증가
금 보관 수요를 이끄는 주요 요인으로는 지정학적 위험과 국가 재정에 대한 불안이 꼽힌다.
최근 수년간 중앙은행들의 금 매입이 증가하면서 금은 주요 안전자산으로 주목받았다. 여기에 일부 부유층은 자국의 정치·재정 상황과 자산 보관에 따른 위험까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레거슨은 블룸버그에 장기간 금을 보관하려는 고객들이 재정 여건이 안정적이고 국방 능력을 갖춘 국가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30~40년 동안 귀금속을 보관하려는 투자자들은 국가의 부채와 연금제도, 정치적 안정성 등을 중요하게 살펴본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재정과 정치 체계, 국제 금융 중심지로서의 기반 등을 갖춘 국가로 평가받는다.
제이 로트바트 앤드 컴퍼니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서방 고객들의 온라인 문의는 3배 증가했다. 국가별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문의가 들어왔으며 캐나다와 영국, 호주가 뒤를 이었다.
귀금속 거래업체 인디고 프레셔스 메탈스도 같은 기간 유럽과 미국 고액 자산가들의 금 수요가 약 25% 증가했다고 밝혔다.
전통적인 금 보관 중심지인 스위스에서도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귀금속 거래 플랫폼 골드(Gauld)는 자사 유럽 고객의 약 40%가 기존에 스위스에 보관하던 금의 일부를 싱가포르로 이전했거나 새로 매입한 금의 보관처로 싱가포르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일부 투자자는 서방 국가들이 제재 대상 러시아 자산을 동결한 이후 스위스의 중립성과 자산 보관 환경을 다시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부유층의 관심은 금의 투자 수익률에서 장기적인 자산 보관의 안정성으로 확대되고 있다.
정부도 금 거래시장 육성…해외 은행들 보관사업 확대
싱가포르 정부는 해외 자금 유입을 활용해 아시아의 주요 금 거래 중심지로 성장한다는 계획이다.
싱가포르거래소(SGX)는 올해 말까지 금 장외거래(OTC) 청산 시스템을 구축할 예정이다. DBS와 도이체방크, JP모건, OCBC 등 주요 금융기관들이 관련 사업에 참여한다.
싱가포르통화청(MAS)도 해외 중앙은행과 정부 관련 기관을 대상으로 금 보관 서비스를 도입하기로 했다.
실물 투자용 귀금속에 투자하는 적격 펀드와 패밀리오피스에 대한 세제 혜택도 확대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를 통해 금 보관뿐 아니라 매입과 매도, 거래 결제 등 관련 금융서비스 전반의 경쟁력을 높일 계획이다.
국제 금융기관들도 사업 확대에 나섰다.
일본 노무라의 국제자산관리 부문은 중동을 비롯한 해외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싱가포르에서 실물 금 수탁 서비스를 시작했다.
싱가포르 화교은행(OCBC)은 올해 실물 금 거래·보관 사업을 확대했다. 이 은행의 프라이빗뱅킹 자회사인 뱅크오브싱가포르 고객들이 보유한 금은 지난해 말보다 40% 이상 증가했다.
싱가포르로 유입되는 금의 규모도 커지고 있다.
무역통계업체 트레이드데이터모니터에 따르면 올해 1~8월 싱가포르의 금 수입량은 171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44% 증가했다.
다만 세계 금 시장에서 런던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다. 런던에는 각국 중앙은행의 준비자산을 포함해 막대한 금이 보관돼 있으며 국제 금 거래와 가격 형성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홍콩과 함께 아시아 금 거래 중심지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안정적인 금 보관시설과 금융 인프라, 국제 거래 서비스를 결합해 해외 투자자를 유치하는 전략이다.
금 보관업체들은 고객들의 수요가 장기 보관에서 거래 편의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금값 변동성이 커지면서 필요할 때 신속하게 매도하고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레거슨은 자산을 분산하려는 투자자에게는 기존 보관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금을 맡기는 방식이 매력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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