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한국 진출 10년의 성취
종주국 미국 이어 시청 2위 우뚝
글로벌 톱10 작품이 무려 200편
식당 예약 4배·해녀박물관 58.9%↑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21억 시간. 지난 1년, 세계가 넷플릭스에서 한국 이야기에 내어준 시간이다. 한 사람이 쉬지 않고 본다면 138만 년이 걸리는 압도적인 시간이다. 종주국인 미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 어떤 국가도 이처럼 많이 보지 않았다.
세계는 이제 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흑백요리사’에 나온 셰프의 식당에 예약을 걸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그린 세신을 받으러 목욕탕 문을 연다. 드라마 속 대사를 이해하고 싶어 한국어를 공부한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어온 지 올해로 10년, 한국 이야기는 화면을 넘어 세계인의 일상으로 걸어 나왔다.
23일 넷플릭스에 따르면, 넷플릭스가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국내 제작사 80여 곳과 손잡고 제작하거나 공동 제작한 한국 작품은 200편을 넘어섰다. 2021년 이후 글로벌 톱10에 오른 한국 작품도 200편 이상이다. 출연진과 제작진 2만5000여 명이 카메라 앞뒤를 지켰고, 더빙·자막 파트너 122곳이 한국어 대사를 세계의 언어로 옮겼다.
넷플릭스는 이날 10주년 기념 웹사이트 ‘넷플릭스와 한국의 10년’과 함께, 한국 콘텐츠가 세계인의 일상에 남긴 자취를 추적한 글로벌 리서치 기업 신더시스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일본의 1.4배, 영국의 약 2배…‘깜짝 흥행’이 아니다
생존 게임 ‘오징어 게임’, SF(Science Fiction) 재난 영화 ‘대홍수’, 가족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K-콘텐츠는 장르를 넘나들며 세계 콘텐츠와 격차를 벌렸다. 세계가 한국 작품을 보는 데 쓴 시간은 일본 작품의 1.4배, 영국 작품의 약 두 배였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가 디지털아이와 함께 2025년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넷플릭스 시청 시간을 제작 국가별로 집계한 결과다.
‘꿀알바’ 김다민 감독은 넷플릭스를 ‘큰 확성기’에 빗대며 “실시간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라고 했다. ‘고백의 역사’ 남궁선 감독이 실감한 것도 국경을 넘어 모인 관객의 크기였다. “한 국가 안에서는 팬층이 광범위하지 않은데 전 세계 팬들이 합쳐지니까 굉장했다.”
한두 편의 흥행으로는 쌓을 수 없는 숫자다. 그 토대에 새 얼굴들이 있다. 최근 3년간 공개된 한국 오리지널 3편 가운데 1편 이상이 신인 감독이나 작가의 손에서 나왔다. ‘킹덤’ 시즌2 조연출을 거쳐 ‘기리고’로 데뷔한 박윤서 감독은 “익숙한 이름에 기대기보다는 새로운 시도를 적극 믿어주기 때문에 가능했던 도전”이라고 돌아봤다. 2021년부터 5년간 넷플릭스 교육 프로그램으로 배움의 기회를 얻은 인력도 6500명을 웃돈다.
이야기의 폭도 넓어졌다. ‘은중과 상연’의 최경숙 기획PD는 “이전에는 ‘가능한 많은 사람이 볼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넷플릭스 이후에는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게 됐고, 소재도 넓어졌다”고 짚었다.
소년범과 사법제도를 정면으로 겨눈 ‘소년심판’의 김민석 작가는 “처음부터 글로벌 성적에 크게 연연하기보다는 우리 이야기를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떠올렸다. 탈영병 체포조의 눈으로 군대의 그늘을 비춘 ‘D.P.’의 한준희 감독은 “위험을 감수해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맛보고, 배우고, 따라 하다…화면 밖으로 걸어 나온 한국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2가 공개되자 셰프들의 예약 장부부터 달라졌다. 공개 뒤 5주 동안 출연 식당 한 곳당 예약·대기 등록 건수는 직전 5주보다 약 303%, 네 배 이상 급증했다.
시즌2에 출연한 서울 ‘스와니예’ 이준 셰프는 AP통신에 “방송 전에는 예약 고객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는데, 지금은 한국 고객들이 워낙 빠르게 예약해 외국인이 자리를 잡기 어려울 정도”라고 털어놨다. 이에 방한 여행사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예약 플랫폼 내 ‘백수저·흑수저’ 필터 활용법을 안내하기도 한다. 넷플릭스 콘텐츠가 여행 일정표로 치환된 셈이다. 서점도 들썩였다. 우정욱 셰프가 2019년 펴낸 요리책은 방송 뒤 20일 동안 직전 20일의 227배가 팔렸다.
‘폭싹 속았수다’는 글로벌 여행객의 발길을 제주로 돌려세웠다. 드라마 인기에 항공 노선 확대가 맞물리며 지난해 제주를 찾은 외국인은 224만 명으로 1년 새 17.7% 늘었다. 제주 해녀의 삶을 기록·전시하는 제주해녀박물관에는 지난해 1~11월 외국인 4만9000여 명이 다녀갔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58.9% 많다. 제주도는 드라마의 세계적 흥행으로 해녀 문화를 향한 해외 관심이 커진 덕으로 풀이했다. ‘해녀(haenyeo)’는 올해 1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외국인 관광객을 목욕탕으로 불러들였다. 여행 플랫폼 클룩에 따르면, 작품 공개 뒤 7주 동안 세신 체험 예약은 직전 7주보다 11%, 서울 서대문구 사우나 입장권 예약은 57% 늘었다.
한국의 말과 물건도 국경을 넘었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에 알려진 ‘달고나’는 2024년 12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올랐다. 2019년 ‘킹덤’이 세계에 알린 조선의 갓은 6년 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사자보이즈의 머리 위에 다시 얹혔다. 관심은 배움으로 이어졌다. 한국어능력시험(TOPIK) 지원자는 2025년 9월에 이미 55만 명을 넘겨 2024년 한 해 지원자 수를 앞질렀다.
마리아 루아 아게테 옴디아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부문 책임자는 “‘오징어 게임’ 같은 몇몇 세계적 흥행작에서 출발한 흐름이 여러 장르에서 국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콘텐츠 생태계로 진화했다”며 “그 꾸준함이 세계 스트리밍 시장에서 한국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