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세 스즈 주연 ‘그대, 별처럼’ 28일 개봉

심은경 ‘신문기자’로 日 아카데미 6관왕

“류세이와는 이창동·설경구 같은 사이”

세 대의 카메라로 새긴 15년…마지막은 필름

심은경 주연 ‘신문기자’로 日 아카데미 6관왕을 휩쓸며 걸출한 픨모그래피를 쌓아온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대원미디어 제공]
심은경 주연 ‘신문기자’로 日 아카데미 6관왕을 휩쓸며 걸출한 픨모그래피를 쌓아온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대원미디어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시간은 곧게 흐르지 않는다. 열일곱 여름에 만난 소년·소녀가 서른둘의 여름에 닿기까지, 15년. 첫사랑이 세상의 무게를 배우고, 꿈이 생활에 밀려나고,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 입을 만큼 긴 시간이다. 오래 입은 청바지처럼, 녹슨 기계의 이음새처럼 삶은 여기저기 닳고 삐걱댄다. 세토 내해의 작은 섬에서 만난 카이(요코하마 류세이 분)와 아키미(히로세 스즈 분)는 그 시간을 함께, 그러나 대부분은 따로 건넌다. 함께 보자던 여름밤의 불꽃은 번번이 어긋난다. ‘그대, 별처럼’은 그 세월을 서두르지도, 부풀리지도 않는다. 일렁이다 가라앉는 감정의 잔물결을 한 뼘 거리에서 가만히 바라본다. 디지털로 시작한 화면은 마지막 장에서 35㎜ 필름으로 바뀐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은 비로소 손에 잡히는 질감을 얻는다.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저녁 하늘에는 가장 먼저 뜨는 별 하나가 남는다.

“단순한 연애 영화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생, 여러 사람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15년 동안 일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을 수 있다면 해 보지 싶었습니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한국을 찾은 후지이 미치히토(40) 감독은 ‘그대, 별처럼’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들려줬다. 그는 심은경 주연의 ‘신문기자’로 일본 아카데미 6관왕을 휩쓴 일본이 사랑하는 감독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2023년 일본서점대상을 받은 나기라 유의 동명 소설. 이달 초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에서 공개, 오는 28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의 출발은 요코하마 류세이였다. 원작 소설을 읽은 류세이가 제작에 참여해 후지이 감독에게 영화화를 제안했다. 10년 넘게 작품을 함께 빚어 온 두 사람의 인연을 후지이 감독은 “마치 이창동 감독과 배우 설경구의 관계와 같다”며 웃었다.

“배우가 이 역을 직접 연기하고 싶다, 지금 이 시대 관객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하는 건 아주 특별한 마음이에요. 형으로서, 친구로서 어떻게든 이뤄 주고 싶었습니다.”

‘국보’,  ‘유랑의 달’의 요코하마 류세이와 ‘가스인간’,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히로세 스즈가 이번엔 ‘그대, 별처럼’으로 만났다. 사진은 ‘그대, 별처럼’ 한 장면. [대원미디어 제공]
‘국보’, ‘유랑의 달’의 요코하마 류세이와 ‘가스인간’,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히로세 스즈가 이번엔 ‘그대, 별처럼’으로 만났다. 사진은 ‘그대, 별처럼’ 한 장면. [대원미디어 제공]

한 번의 레드카드, 그 뒤에 남는 것

연애소설의 얼굴을 한 원작에서 후지이 감독이 읽어 낸 것은 지금의 일본 사회이자, 어쩌면 모두가 딛고 선 이 세계다.

“지금 일본에선 ‘올바름’이라는 말 하나가 사람을 붙잡고 있어요. SNS 속 상식이 있고, 거기 비친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처럼 보이죠. 일본은 기본적으로 두 번째 기회가 없는 세상이에요. 사람들이 정말 자유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지, 원작엔 그 물음이 절실하게 쓰여 있었어요.”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판단할까. 후지이 감독은 오래도록 이 질문 곁에 머물러 있었다. 권력이 덮으려는 진실 앞에 선 기자(‘신문기자’)에게도, 조직을 떠난 뒤에도 낙인을 지우지 못한 남자(‘야쿠자와 가족 더 패밀리’)에게도, 쫓기는 살인 용의자를 저마다 다른 얼굴로 기억하는 사람들(‘정체’)에게도 같은 질문이 놓여 있었다. 사회파의 문법으로 던지던 질문을 이번엔 한 연인이 지나는 15년 길 위에 내려놓았다.

후지이 감독은 “일본에는 한 번에 레드카드를 내미는 분위기가 있다. 잘못이 나쁜 건 당연하겠지만,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지 않게 된다”고 봤다.

“다가가면 실패할지도, 부딪칠지도 모르니까요. 그 끝에 기다리는 건 고독과 공허예요. 끝내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 부딪치며 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 거기에 본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후지이 감독 역시 시선과 잣대 속에서 살아내는 사람이다. 그는 “남의 인생을 필요 이상으로 공격하는 사회에서 저는 비교적 공격받는 쪽”이라며 “그래도 ‘그만하라’고 외치기보다, 이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배경과 인생이 있다는 걸 영화로 제대로 그려 내고 싶었다”고 했다. 고발 대신 이해를, 훈계 대신 사연을 택하는 것이 후지이 감독의 방식이다.

요코하마 류세이와 히로세 스즈 주연 ‘그대, 별처럼’ [대원미디어 제공]
요코하마 류세이와 히로세 스즈 주연 ‘그대, 별처럼’ [대원미디어 제공]

영화 속 두 주인공 카이와 아키미의 어깨엔 처음부터 제 몫이 아닌 짐이 얹혀 있다. 아키미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에게 떠난 뒤 무너져 내린 어머니 곁을 지키느라 꿈도 사랑도 미뤄둬야 했다. 카이 역시 부모가 드리운 그늘을 끌어안은 채 섬에 닿는다. 후지이 감독은 두 사람이 짊어진 것을 ‘원죄’라고 했다.

“부모를 고를 수 없듯, 태어난 환경도 고를 수 없잖아요. 그 원죄가 십자가처럼 두 사람을 짓눌러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지 자신을 의심하게 하고, 부모와 다른 삶을 살려 해도 저주처럼 따라붙죠.”

두 사람이 이고 있는 ‘원죄의 저주’를 가까이서 지켜본 어른이 고교 시절의 화학 교사 기타하라(하세가와 히로키 분)다. 세상의 셈법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선택을 거듭하는 인물이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선 이들이 마지막에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이자 안전망이자 희망이다. 후지이 감독은 “기타하라 선생 역시 과거의 원죄를 안고 사는 사람”이라며 “올바름에 묶여 살기보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서라도 누군가에게 무상의 사랑을 바치는 것, 일본 사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어 주었다면, 하는 나기라 선생의 기도가 구현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출하는 동안 저도 되도록 기타하라 선생으로 있으려 했습니다.”

‘한 번뿐’인 필름에 새긴 30대, 그리고 다음 장

15년의 세월은 화면의 결로 쌓였다. 첫 장은 20대 시절 촬영감독과 함께 마련한 DSLR, 다음 장은 ‘많은 만남’을 가져다준 알렉사(ALEXA), 마지막 장은 35㎜ 필름이다. 영화 속 두 사람의 15년 위에 감독 자신이 지나온 15년을 포갰다. 그는 “저희가 걸어온 15년이 이 소설과 꼭 맞물리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했다”며 “제겐 30대 마지막 영화였고, 이게 마지막이 돼도 좋다 싶었다. 20대부터 만들어 온 것의 집대성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돌아봤다. 필름의 매혹은 몇 해 전 기무라 다이사쿠 촬영감독과 ‘항구의 빛’을 찍으며 마주하게 됐다.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대원미디어 제공]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대원미디어 제공]

“필름은 한 번뿐이잖아요. 디지털처럼 ‘한 번 더 갈게요’가 통하지 않죠. 시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그게 카이의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했어요.”

후지이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선 절반가량이 원작이 있는 작품, 절반은 순수 창작물이다. 그가 원작을 대하는 태도엔 창작자로의 소신이 담겨있다. 후지이 감독은 “소설을 따라가기만 할 거면 솔직히 소설을 읽는 편이 낫다. 영화라면 여러 사람의 인생과 마음을 제대로 겹쳐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소설과 달리 카이의 뒷모습으로 문을 연다. 여름마다 어긋나는 불꽃과 저녁 하늘의 첫 별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맞닿을지, 감독은 그 한 장면을 향해 불꽃을 수없이 쏘아 올렸다.

스스로 ‘30대의 졸업 작품’이라 부른 영화를 내놓으며, 감독은 일본 언론에도 이렇게까지 분명히 밝힌 적 없다는 결심을 꺼내 놓았다. “아마 이번을 계기로 몇 년 동안은 일본 작품은 연출을 거의 하지 않을 겁니다. 들어오는 것도 받지 않고 있어요. 한 번 발걸음을 멈추고 환경을 바꿔, 다시 공부해야 할 때가 것 같아요.”

결심의 뿌리는 유년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그는 “전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고, 할아버지는 대만인이다. 일본인인 게 자랑스럽지만, 아시아인이라는 마음이 아주 강하다”며 “젊을 땐 내셔널리즘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영화를 만난 게 운명 같다”고 했다. 30대라는 한 롤을 남김없이 감은 감독은 이제 새 필름을 걸어 넣는다. 지나간 장면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필름의 이치를 자기 삶에도 고스란히 새겼다.

“영화엔 영상 언어가 있어 말을 넘어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좋았어요. 지금은 아시아 영화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엮어 가고 싶어요. 제가 무엇을 잘 찍는 감독인지는 평생 모를 것 같아요. 그러니 천천히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