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닥터 X:하얀 마피아의 시대’
4회만에 18.5%·넷플릭스 비영어 1위
일드에 이식한 한국 의료계 현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병원장이 쓰러지자 의사들은 메스를 집어 던졌다. 고령 환자의 배를 열어 둔 채였다. 명성을 과시하려 무리한 개복 수술을 밀어붙이던 병원장이 라텍스 수술 장갑 알레르기로 쇼크에 빠진 순간이었다. 인턴과 마취과 전문의, 간호사들만 남겨진 수술방엔 고성이 오갔다. ‘환자’는 어떻게 하냐는 애원에 의사들은 “원장님이 먼저”라며 수술실을 떠난다. 그 빈자리에 프리랜서 외과의 계수정(김지원 분)이 들어왔다. 수술을 마친 그는 병원장을 따라 줄줄이 떠났던 의사들에게 쏘아붙인다.
“이래서 내가 너네들 싫어한다니까. 돈 잘 벌고 출세하려고 공부만 한 인간들…너희 진짜 후져.”
SBS 금토드라마 ‘닥터X: 하얀 마피아의 시대’(이하 ‘닥터X’)가 첫 회부터 겨눈 과녁은 한 사람의 의사가 아니었다. 의대와 병원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위계다. 윗선의 판단에 이의를 달지 못하는 수술실, 환자보다 서열이 앞서는 병원. 드라마는 한국 대학병원 시스템의 곪은 자리를 골라 최대치로 부풀린다. 이 통쾌한 ‘과장의 서사’에 시청자가 응답했다.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는 주인공은 김지원이다. ‘눈물의 여왕’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그는 이번에도 해냈다.
상승 곡선이 가파르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전국 기준 1회 11.4%, 2회 14.9%, 3회 15.1%, 지난 17일 4회 18.5%. 한 회도 빠짐없이 올랐다. 1회 성적은 올해 미니시리즈 첫 회 최고치다. 넷플릭스 공식 집계 사이트 투둠에선 10월 5~11일 비영어 TV쇼 글로벌 1위에 올랐다. 공개 사흘 만에 시청수 460만 회, 시청 시간 990만 시간을 쌓았다. 36개 국가·지역 톱10에 들었고 한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 7곳에선 정상을 밟았다. 원작의 나라 일본에서도 같은 주 9위로 톱10에 진입했다.
같은 뼈대, 다른 체온…14년 만에 바다 건넌 미치코
드라마의 원작은 TV아사히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일곱 시즌, 69회를 이어간 ‘닥터X: 외과의 다이몬 미치코’다. 요네쿠라 료코의 다이몬 미치코가 “저, 실패하지 않으니까요”를 내뱉을 때마다 일본 안방이 들썩였다. 전 시즌 평균 가구 시청률은 20.4%(비디오리서치·간토 지역)에 이른다. 2024년엔 극장판까지 나왔다. 한국판은 이 시리즈의 첫 해외 리메이크다.
골격은 고스란히 옮겨 왔다. 의사 소개소가 파견한 프리랜서, 계약서에 못 박은 ‘하지 않는 일’의 목록, 정시 퇴근과 고액 수당이 그대로다. 일본 대중문화 평론가 마쓰타니 소이치로는 야후재팬 기고에서 원작을 “야마자키 도요코의 소설 ‘하얀 거탑’과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블랙잭’”을 포갠 작품으로 봤다. 대학병원의 권력 정치 한복판에 고독한 천재 외과의를 던져 넣은 구조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극명한 온도차다. 원작은 마작판과 대중목욕탕 장면 같은 코믹한 쉼표를 곳곳에 찍었다. 마쓰타니는 “한국판이 훨씬 진지한 기조이며 코믹한 장면은 거의 사라졌다”고 짚었다. 원작의 상징인 결정 대사 역시 한국판에선 상대적으로 덜 강조된다고 봤다. TV아사히가 리메이크 계약을 발표하며 한국판을 ‘사회파 서스펜스’, ‘메디컬 누아르’로 소개한 대목과 맞물린다.
계수정의 겉모습도 덜어냈다. 짙은 화장과 하이힐, 몸에 붙는 옷차림이 미치코의 갑옷이었다면 계수정은 단발에 투박한 부츠, 수수한 옷차림으로 화면을 채운다. 김지원은 제작발표회에서 “전작엔 화려한 패션으로 많이 보여드렸는데 이번엔 최대한 많이 덜어내고자 했다”고 털어놨다.
파업·CCTV·청소 노동자…한국 병원의 썩은 자리를 키우다
본격적인 한국화는 서사에서 일어난다. 원작이 교수 회진의 긴 행렬과 학벌·파벌 다툼, 곧 ‘하얀 거탑’식 의국 정치를 겨눴다면 한국판은 지금 이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의료 현실을 극 안으로 끌어들였다. 의대 증원에 반대한 집단 파업,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가 그것이다. 병원에 소속되지 않은 ‘용병 의사’라는 원작 설정은 파업 이후 인력이 바닥난 병원과 만나 새로운 설득력을 얻었다.
드라마가 매회 만들어내는 환자도 달라졌다. 마쓰타니에 따르면 권력자와 서민 환자의 수술이 겹치는 2회의 설정에서, 원작은 서민 쪽을 향하지 않았다. 한국판은 그 자리에 장애인 엄마, 파업 중인 노동자 이모를 둔 중학생 소녀를 세웠다. 계수정은 VIP이자 이모가 파업 중인 회사의 오너인 환자의 휠체어를 빼앗아 소녀를 옮긴다. 3회에서 뇌동맥류로 실려 온 환자는 병원 청소 노동자 여정순이다. 원내에 수술할 의사가 없어 전원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이야기가 시작된다. 의료 공백의 제일 끝에 누가 서 있는지 드라마는 정확히 짚고 있다.
대학병원 의사들에게 ‘하얀 마피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대로다. 이들이 비겁하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건 개개인의 악의 탓이라기보다 서열과 이해관계가 빚어낸 결과로 그려진다. 병원장 앞에서 입을 닫고 위기 앞에서 달아나는 의사들은 구조가 낳은 인물형에 가깝다. 드라마는 그 구조의 썩은 단면을 확대경 아래 놓는다.
주인공의 성별도 장르의 계보 안에서 들여다 보면 새로워진다. ‘하얀거탑’(2007)부터 ‘낭만닥터 김사부’, ‘중증외상센터’(2025)까지 압도적 실력의 천재 의사는 대개 남성의 몫이었다. 여성 의사가 주인공인 ‘외과의사 봉달희’(2007), ‘닥터 차정숙’(2023)은 성장과 전환의 서사에 가까웠다. 계수정은 완성된 실력으로 등장해 남성 중심의 위계를 흔든다. ‘태양의 후예’, ‘눈물의 여왕’으로 로맨스의 얼굴이던 김지원이 멜로 없는 장르물에서 원톱을 증명하는 장면은 원작의 공식과도 겹친다. 원작 역시 주인공의 연애를 철저히 걷어냈다.
“의료진 단순화” 민원…과장의 수위를 둘러싼 이견
과장의 수위를 두곤 이견이 나오고 있다. 자신을 정형외과 의사라고 밝힌 A씨는 지난 13일 방송미디어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신청했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알렸다. 그는 “회진을 불필요한 잡무처럼 묘사하고, 의료진을 무능한 악역으로 단순화하며, 의료행위의 불확실성마저 외면하는 연출이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제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다는 점은 스스로 인정했다. 이 소식은 일본 스포츠지 데일리스포츠를 통해 원작의 나라에도 전해졌다.
고증을 둘러싼 지적도 잇따랐다. 1회에서 서혜부 탈장 환자를 응급수술로 보낸 판단, 300J 제세동 장면 등이다. 현장 의학 자문을 맡은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SNS에 “의학적으로 틀린 부분이 나온다면 자문이랑 제작진이랑 싸우다가 자문이 패배한 걸로 보시면 된다”고 적었다. 제작진은 매회 픽션이며 실제 의료 현장과 다르게 각색된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자막을 띄운다. SBS는 “별다른 입장이 없다”고 했다.
사실 원작에서도 의사들을 희극적으로 그렸다. 다만 일본판이 일반화된 ‘하얀 거탑’을 풍자했다면, 한국판은 불과 몇 해 전 진료 공백을 실제로 겪은 시청자 앞에서 같은 과장을 펼친다. 웃어 넘기는 통쾌함 뒤에 불편한 질문이 남는 이유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