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서 40억달러 확보 외에
우크라의 러 폭격 자제 효과
美와 우크라·EU 균열도 커져
푸틴의 경제적·정치적 승리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와 경유 거래를 하고 우크라이나에 러시아 에너지 시설 공격 중단을 요구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뜻밖의 정치적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에너지 휴전’에 합의했다며, 향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휴전 협상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지만, 푸틴의 속내는 기대와 사뭇 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번 ‘경유 딜’이 오히려 푸틴 대통령의 경제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2일(현지시간)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에너지 전문가들은 이번 경유 공급 합의가 실제 이행될 경우 약 40억달러(약 5조3000억원)의 미국 자금이 러시아 경제에 유입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까지 중단한다면 이로 인해 러시아가 얻는 경제적 이익은 훨씬 클 수 있다고 분석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상대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한 ‘경제적 지구력 싸움’으로 양상이 변했다. 전문가들은 양국의 군사적 대치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경제 기반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가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고 봤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산 경유 구매와 우크라이나 정유시설 공격 중단 요구가 현실화할 경우 경제전의 균형이 러시아에 더욱 유리하게 기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침략국인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힘의 균형을 기울이려 하고 있다”며 “양국 군대가 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는 경제적 대결에서 러시아를 지원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AP통신은 미국과 러시아의 경유 공급 합의와 트럼프 대통령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판은 러시아 크렘린궁에 중요한 정치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의 경유 딜이 러시아의 전쟁 자금 조달에 기여한 것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들이 구축해온 대러시아 공동 대응 전선까지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가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러시아가 얻을 정치적 이익은 경제적 효과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전문가이자 정보분석업체 마야크 인텔리전스 대표인 마크 갈레오티는 “러시아산 경유가 단 한 배럴도 수출되지 않더라도 푸틴에게는 선물”이라며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사이를 더욱 깊고 넓게 갈라놓는 쐐기를 박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경유 딜’을 두고 “전쟁에 투자하는 행위”라고 비판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반응에 “우크라이나가 새 대통령을 맞을 때가 됐다”고 말했다. 공식 임기는 끝났지만 전쟁으로 대선을 치르지 못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상황을 꼬집어, 젤렌스키의 정당성을 문제삼은 것이다. 이는 종전 협상 요구에 대해 푸틴이 줄곧 지적해온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다. 푸틴은 젤렌스키는 임기가 끝났기 때문에, 현 젤렌스키 행정부와 협상을 할 수는 없다며 우크라이나 측 요구를 줄곧 외면해왔다. AP는 이에 대해 지난해 2월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공개적으로 충돌한 이후 양국 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경유 딜’ 발표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습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면 무기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협박’까지 받아, 러시아를 타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크라이나는 패트리엇 방공 시스템과 핵심 정보 제공 등 군사적 지원을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미국의 지원이 중단되거나 차질을 빚을 경우 러시아의 공격에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의미 있는 양보를 얻어내지 못한 채 제재를 완화할 경우 미국이 크렘린궁에 행사할 수 있는 협상력이 약해질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와 푸틴의 경유 거래는 유럽연합(EU)의 대러시아 제재 정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갈레오티는 “이번 경유 딜이 러시아산 원유를 세계 시장에 운송하는 이른바 ‘그림자 선단’을 제재하려는 EU의 노력에도 의문을 제기한다”라며 “백악관에서 나오는 정책이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하는 종속 지역으로 취급받는 상황에 놓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번 합의가 개발도상국들 사이에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러시아가 협력할 가치가 있는 강대국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 센터의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연구원은 이번 조치가 “푸틴 대통령에게 승리의 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푸틴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규모는 작지만 경제적 합의를 확보했다. 미국이 기존에 취해온 입장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현재 태도를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기에 더욱 유리한 여건이 조성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며 “러시아의 군사적 압박이 전장에서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보다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정치적 붕괴를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분석했다.
yckim6452@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