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극단 ‘에너미’ 26일 개막

입센 ‘민중의 적’ 동시대 재해석

연극 ‘에너미’ 강훈구작가, 이준우 서울시단장 예술감독, 배우 이봉련, 문소리, 강신구(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에너미’ 강훈구작가, 이준우 서울시단장 예술감독, 배우 이봉련, 문소리, 강신구(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우리가 사는 사회가 예전에 꿈꿔왔던 미래인가 하는 고민을 많이 해요. 과연 더 자유로워졌는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강훈구 작가)

한 사람이 ‘민중의 적’이 되기까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연극 ‘에너미(The Enemy)’에선 단 하루면 충분하다.

헨리크 입센의 ‘민중의 적’(1882)을 2026년의 무대로 가져온 ‘에너미’가 그리는 세계는 놀랍도록 지금의 현실과 닮았다. 연출을 맡은 이준우 서울시극단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미디어로 진실을 더 잘 알 수 있고 더 투명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회엔 또 다른 얼굴이 있다”며 “개인의 안위와 이득, 질투와 혐오가 겹쳐지면서 예전보다 진실을 알기가 훨씬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극작가 키어런 헐리가 각색하고 강훈구가 번역·윤색한 이 작품은 입센의 시대를 SNS 시대로 옮겨 왔다. 원작의 형제는 자매로, 온천은 친환경 리조트 ‘빅 스플래쉬’로, 인쇄업자는 지역의 대형 유튜버로 옷을 갈아입었다.

주인공 커스틴 스토크만은 지역 재생을 위해 추진되는 친환경 리조트 사업에 참여했다가 수돗물이 오염됐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커스틴에게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당연히 알려야 할 진실이지만, 주민들에게 리조트는 지역 경제를 살릴 절호의 기회이자 생계와 직결된 문제다. 시장인 언니 보니는 물론 친구인 기자와 유튜버, 주민, 투자자들의 이해관계가 뒤얽히면서 커스틴을 향한 여론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진실을 말하려던 사람이 마녀사냥의 표적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채 하루가 되지 않는다. 한 개인이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삽시간에 ‘민중의 적’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관객은 실시간으로 목도한다.

강훈구 작가는 “매일매일 어떤 사람이 하루 만에 영웅이 됐다가 다시 민중의 적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서운 마음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일 것”이라며 “‘왜 이 사회는 민중의 적을 만들어 가지만 달라지지 않는가’, ‘과연 누가 진짜 민중의 적일까’라는 질문을 관객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작품이 되리라 믿는다”고 했다.

연극 ‘에너미’ 강훈구 작가, 배우 문소리, 이준우 서울시단장 예술감독, 배우 이봉련, 강신구(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에너미’ 강훈구 작가, 배우 문소리, 이준우 서울시단장 예술감독, 배우 이봉련, 강신구(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지난해 11월 서울시극단장에 취임한 이준우 연출에게 ‘에너미’는 취임 첫 작품 ‘빅마더’를 잇는 두 번째 미디어 탐구다. 그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곁의 누군가가 바라보는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걸 요즘 많이 느낀다”며 “SNS나 미디어에서 가볍게 던진 말들의 무게라는 것이 요즘은 없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짚었다.

그가 무대에 옮기려는 것은 여론이 이동하는 양상이다. 이 연출은 “미디어는 누군가를 대상으로 삼고, 그 대상이 흥미에서 벗어나거나 관심이 식으면 프레임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며 “커스틴을 공격한 사람들이 과연 모두 진실인가 아닌가, 이 사회에 옳은가에 대한 투철한 의식으로 그 댓글들을 달았을까”라고 반문했다.

미디어 환경의 병리적 현상은 다양한 장치로 구현된다. 무대 위 스크린을 대폭 늘리고, 실시간 댓글과 유튜버의 생중계 화면을 배우의 연기에 겹쳐 놓는다. 강 작가는 “원작과 각색본에 없는 댓글을 따로 수집하고 있다“며 “관객이 이 공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연출은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이 잘못 쓰였을 때 서로를 찌르는 칼이 될 수 있다”며 “서로 자신을 피해자라 주장하는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분열된 사회의 한 장면을 다룰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커스틴 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문소리와 이봉련은 인물이 맞닥뜨린 ‘진실의 파편화’를 날카롭게 짚어간다.

문소리는 “처음 읽었을 때 엄청난 속도감과 공포심을 느꼈다”며 “입센의 원작은 박사가 진실이고 그것을 은폐하려는 구도가 확실했지만, 연습을 해보면 해볼수록 진실이 뭘까, 각자 믿는 각자의 입장이 진실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니 얘기는 언니 입장에서 맞고, 기자는 기자 입장에서 맞고, SNS에 올라오는 댓글도 각자의 입장에서는 다 맞는 이야기 같다”며 “각자의 진실이 다 다르고, 그것들이 충돌하고 모여서 힘을 가진다”고 설명했다.

연극 ‘에너미’ 강훈구 작가, 이준우 서울시단장 예술감독, 배우 이봉련, 문소리, 강신구(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연극 ‘에너미’ 강훈구 작가, 이준우 서울시단장 예술감독, 배우 이봉련, 문소리, 강신구(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이봉련은 커스틴을 ‘보통의 사람’으로 봤다. 그는 “거대 담론을 불러일으켜 내면을 비추는 연극이 아니라 보통의 한 사람이 짧은 시간 안에 겪게 되는 일”이라며 “꼭 나와 같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흥미를 가졌다”고 돌아봤다.

28년 전 서울시극단의 ‘민중의 적’에서 빌링 기자를 연기한 강신구는 이번엔 커스틴의 시아버지인 사업가 데릭 역으로 팽팽한 긴장을 보탠다. 그는 “28년 전에는 ‘다수는 결코 옳지 않다’는 명제가 강렬하게 남았는데, 2026년 이 시대를 보면 훨씬 더 오늘에 어울리는 작품”이라며 “궁지에 몰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다. 가족과 사랑을 빌미로 한 그 이중적인 모습을 잘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되는 시대에 사는 배우들은 커스틴의 질문을 무대 밖에서도 마주한다. 말할 것인가, 말한다면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사회적 발언을 둘러싼 질문에 문소리는 “결정 내리지 못했다. 늘 고민한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언제 말해야 하나”라며 “그때마다 저도 많이 상처받지 않고, 제 말로 인해 다른 사람도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봉련은 “내가 선택한 작업들이, 동참하기로 한 이상 제가 내는 목소리라고 분명히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는 “SNS가 광장의 기능을 대신하게 됐는데, 이 공연을 보고 밖에 나가면 다시 광장에 서게 된다”며 극장에서 던진 질문이 객석 밖에서도 유효하기를 바랐다.

강훈구 작가는 작품의 백미로 적으로 몰린 커스틴의 긴 연설을 꼽았다. 현실에선 ‘민중의 적’으로 낙인찍힌 개인이 캔슬 컬처의 뒤편으로 밀려나 침묵하기 일쑤지만, 고전은 적으로 몰린 이에게 끝까지 자기 언어로 항변할 발언권을 쥐여준다. 강 작가는 “민중의 적으로 몰린 사람들은 보통 적으로 몰리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입센은 스토크만 박사에게 발언권을 준다”며 “그 연설이야말로 이 작품의 백미”라고 했다. 우리는 과연 더 자유로워졌는가. 작가의 물음은 그 연설을 끝까지 들어야 하는 객석으로 넘어간다. 공연은 26일부터 11월 14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