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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의 오늘] 하미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
[헤럴드경제=정찬수 기자] “전쟁은 자연스럽지 못한 죽음을 낳는다. 이 죽음은 제자리에서 벗어난 죽음, 즉 집과 일가친척들로부터 떨어진 죽음이며, 시간적으로도 어긋난 젊고 건강한 나이의 죽음이다. 현대 전쟁에서는 군인보다 비전투원이 더 많이 죽는다. 이런 죽음은 전쟁의 폭력을 억제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에 어긋난다.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정치적 목적과 이데올로기를 위해 죽은 이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가족들에게서 그들을 앗아가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자(死者)들을 역사의 행위자가 아니라 도구로 뒤바꾼다.”

권헌익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의 ‘학살, 그 이후’ 서문의 내용입니다. 그는 인류학자의 통찰력을 통해 전쟁 이후 사라지지 않는 후유증과 파헤쳐진 공동체의 삶에 대해 무거운 질문을 건넵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지워주진 않습니다. 과거의 아픈 실수를 뉘우치는 자들과 조상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희생자들의 주변부로 밀려난 현지인들도 여전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기 전, 아픈 기억을 꺼내는 일조차 조심스럽습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2월25일, 꽝남성 디엔반 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 주민들은 일상적인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자신들에게 빵을 나눠주던 한국군들에 작은 호감을 느꼈던 탓일까요, 이날 역시 주민들을 모으는 한국군인들 무리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한국군들은 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를 동원해 모인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떠나갈듯한 총성과 폭발음은 2시간 동안 이어졌고, 주민 135명이 숨졌습니다.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청룡부대가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하미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입니다.

숨진 이들은 아이들과 여성, 노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쟁 상황인 탓에 젊은 사내들은 마을을 비웠거나 타지로 가 있던 상태였죠. 청룡부대의 3개 소대가 마을을 포위했지만 이를 의심하는 이는 적었습니다.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마을로 분류됐고, 주민 역시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기 때문이죠. 당시 전략촌으로 설정된 경우에도 전세의 흐름에 따라 한 순간에 ‘베트콩 마을’로 낙인이 찍히면 비무장 민간인들이 큰 희생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소수의 인원들은 숲에서 학살의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땅거미가 내리자 그들은 마을로 들어와 무덤을 파고 훼손된 시신들을 한꺼번에 모아 묻었습니다. 먹을거리가 충분치 못했던 탓에 힘도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판 무덤은 시체를 가릴 정도로 얕은 깊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한국군은 불도저를 몰고 다시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불도저는 처리하지 못한 시신들을 깔아뭉개고 가매장한 시신까지 밀어버렸습니다.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지만 민족해방 전선 지역의 출신이란 이유로 난민촌에도 못 들어가고 거리에 나앉게 됐죠.

지난 2000년 10월, 베트남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는 미국 사료관 문서관리소로부터 받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조사보고서를 공개합니다.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하던 국방부의 공식입장을 반박한 것이죠. 보고서에는 퐁니ㆍ퐁넛 마을 사건 등 자세한 묘사와 충격적인 사진들이 포함돼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불러일으켰습니다.

같은해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하미 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해 위령비를 세웁니다. 하지만 학살 피해자들이 적힌 비문을 지워줄 것을 요구해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겪습니다. 결국 위령비는 연꽃 문양이 그려진 대리석을 덧씌운 상태로 제막됐죠. 하미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음력 1월24일을 전후로 위령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2013년에야 한국인이 최초로 위령제에 참석했습니다.

andy@heraldcorp.com



<사진설명> 연꽃 그림으로 덮여있는 하미 마을 위령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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