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 삶의 현장’에서 ‘백수 이세돌’까지
고생 예능 33년, 땀의 의미가 바뀌어
이제 고생은 ‘과정’ 그 자체가 콘텐츠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잠실야구장 관중석 계단. 20㎏짜리 배낭을 멘 ‘맥주 보이’가 힘겹게 무릎을 굽힌다. 바둑판 위의 승부사로 군림했던 이세돌(43).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잔마다 거품이 넘쳤고, 당황한 손은 결제 카드조차 제대로 꽂지 못했다. 목표한 100잔 가운데 86잔을 가까스로 팔았다. 알파고를 상대로 인류에게 ‘유일한 1승’을 안겨준 바둑 9단의 첫 아르바이트 성적표다.
지난 8월 27일은 이세돌이 LG 트윈스와 NC 다이노스 경기의 시구자로 나선 날이었다. 던진 공이 땅에 꽂힌 후 바둑 9단은 곧장 맥주 배낭을 둘러메고 관중석으로 다시 출근했다. 최근 시작한 KBS2 예능 ‘백수 이세돌’ 이야기다. ‘신의 한 수’를 두던 손으로 맥주를 따르고, 요구르트를 배달하고, 한강 수영장 바닥을 벅벅 닦아낸다. 그의 이력서 ‘퇴사 사유’ 칸에 적힌 두 글자는 ‘AI(인공지능)’였다.
2016년 3월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이세돌은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와 ‘세기의 대결’에서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4국 78수로 따낸 1승은 지금도 ‘신의 한 수’로 불린다. 이세돌은 최근 한 예능에서 2국을 내준 뒤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이기기 어렵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충격파는 바둑계 전체를 덮쳤다. 판의 정답을 쥔 쪽은 이제 사람이 아닌 기계다. 작가 장강명은 르포 ‘먼저 온 미래’(2025)에서 평생 익힌 이론을 지우고 AI에게 바둑을 다시 배워야 했던 프로기사들의 시간을 기록했다. 치열한 뇌 노동의 정점에 섰던 이세돌의 이력서에 적힌 퇴사 사유 ‘AI’는 비록 예능에서 나온 내용이라 할지라도 결코 쉽게 웃어넘길 수 없는, 시대의 마침표였다.
‘백수 이세돌’ 첫 방송에서 그는 자신을 “AI로 인해 직업의 변화를 맞은 사람”이라 소개했다. 물론 문자 그대로의 ‘백수’는 아니다. 강연과 방송을 이어왔고 UNIST 특임교수로도 활동한다. 다만 바둑만큼 자신을 대변할 일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곳이 AI가 쉽게 넘보지 못하는 ‘아날로그 육체노동’의 현장이다. ‘백수 이세돌’ 이명섭 PD는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노동을 직접 경험하는 데 집중해 주면 좋겠다”고 귀띔했다. 첫 방송은 닐슨코리아 기준 최고 2.9%로 동시간대 예능 1위에 올랐다.
땀 흘리는 건 이세돌만이 아니다. 올해 예능가는 그야말로 ‘사서 고생’ 중이다. 넷플릭스 ‘유재석 캠프’와 ‘대환장 기안장 시즌2’의 직원들은 숙박객을 챙기느라 뛰어다녔고, ‘대체 등산을 왜 하는 건데?’의 네 남자는 한겨울 설산에 던져졌다. tvN ‘우주떡집’의 ‘지락이’(예능 ‘지구오락실’의 네 출연자, 이은지·미미·영지·안유진)들은 새벽 5시에 떡을 뽑았고, ENA ‘아이돌 파견근무’의 아이돌들은 휴가 간 회사원 대신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이처럼 요즘 예능은 타인의 여유를 엿보던 ‘힐링 예능’에서 나보다 더 땀 흘리며 동분서주하는 사람을 구경하는 ‘고생 예능’으로 전환되는 양상이다. AI가 사람의 일을 넘보며 ‘뇌 노동’을 빼앗기자, 인류는 육체 노동의 고단함에 카메라를 비추며 ‘아날로그적 도파민’을 찾고 있다.
머리는 AI에게, 관절은 사람에게
“AI가 인간을 못 따라오는 게 관절을 많이 쓰는 직업이라고 하더라고요.”
‘백수 이세돌’ MC 장도연은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도연의 발언은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이 1988년 정리한 ‘모라벡의 역설’에서 나온 말이다. 기계에게 복잡한 계산은 숨 쉬듯 쉽지만, 걷고 쥐고 부딪히는 신체 활동은 혹독한 미션이라는 게 모라벡의 요지다. 바둑으로 기계에 패배한 천재가 맥주 통을 메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짠내 나는 풍경은 이 역설을 증명하는 ‘예능판 랩소디’다.
‘인간의 불안’은 숫자로 드러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22년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줄어든 15~29세 청년 고용 28만5000명 가운데 94%가 정보서비스·출판·컴퓨터 프로그래밍처럼 AI 노출도가 높은 산업에서 나왔다. 책상 앞 일자리가 먼저 흔들리는 사이, 몸으로 하는 일은 새로운 볼거리가 됐다.
요즘 예능의 공식은 우리가 알던 ‘초고수’를 완벽한 ‘초보’로 백지화하는 역전 현상이 골자다. 바둑 9단은 열아홉 살 어린 안유경 씨에게 맥주 판매 요령을 조아리며 배운 뒤 “바둑 두는 게 제일 쉬웠다”며 혀를 내두른다. 요구르트 판매 알바를 하면서는 배달 실수로 민원까지 받는다. 익숙한 세계에서 최고였던 사람이 낯선 일 앞에서 서툴러지는 과정이 서사가 된다. 이명섭 PD가 기획 의도로 꼽은 것 역시 “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세돌이라는 캐릭터가 전하는 휴머니즘과 생존의 재미”였다.
일출도 ‘꼴 보기 싫은’ 고생 예능도 등장했다. 영하 27.5도. 지난겨울 설악산으로 카더가든, 데이식스 도운, 배우 이채민, 올데이프로젝트 타잔이 몸을 던졌다. 넷플릭스 예능 ‘대체 등산은 왜 하는 건데?’ 촬영을 위해서다. 이들은 설악산을 시작으로 태백산과 한라산을 줄줄이 올랐다. 사실 섭외 단계에서 등산 얘기는 쏙 빠졌다. ‘남자판 지구오락실’인 줄 알았다는 이채민은 ‘취업 사기’를 주장할 정도다.
나영석 PD는 앞서 제작발표회에서 “오늘의 예능에서 ‘고생’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이 이 프로그램에 들어 있다”고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가 아니라, 고생 그 자체가 낙이다.
지난 9월 공개된 ‘대환장 기안장 시즌2’의 대관령 2호점은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지은 듯한 거대한 원룸이다. 둘이 힘을 합쳐야 열리는 5m 현관문, 초대형 수세미를 타고 올라야 닿는 2층 부엌, 배구공을 던져야 꺼지는 전등. 김연경조차 “저한테도 불편한 숙소였다”고 했다. ‘일잘러’ 직원 이준호는 “몸이 피곤한 일은 내가 다 하고 싶은 생각이어서 정말 열심히 일했던 기억밖에 없다”고 돌아봤다. 공개 첫 주 화제성 점수는 시즌1보다 88.3% 뛰었다. 5월 공개된 ‘유재석 캠프’도 첫 주 시청수 180만으로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 쇼 5위에 올랐다.
‘체험 삶의 현장’에서 ‘백수 이세돌’까지
노동을 예능의 소재로 삼은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1993년 시작한 KBS ‘체험 삶의 현장’은 유명인이 다양한 일터에서 노동을 경험하고 출연료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노동의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전했다. 2000년대 ‘1박2일’에서 고생은 주로 벌칙과 웃음을 위한 장치였고, ‘정글의 법칙’에서는 생존과 극한 상황을 증명하는 무대가 됐다. 2014년 ‘무한도전’의 ‘극한알바’는 출연진이 실제 노동 현장에 뛰어들며 일의 고됨과 노동자들의 현실을 조명했다.
최근의 노동 예능은 이 계보 위에 있으면서도 노동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 고생은 더 이상 기부의 수단도, 징벌적 웃음도, 감동으로 가는 억지 관문도 아니다. 영하 27.5도의 설악산으로 끌려간 ‘대체 등산은 왜 하는 건데’ 출연진은 일출 따위 꼴도 보기 싫다며 투덜대고 짜증을 낸다. 힘들면 힘들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솔직한 과정 그 자체가 콘텐츠다.
고생의 방향도 저마다 다르다. 자신의 한계와 씨름하는 고생(‘대체 등산은 왜 하는 건데’)이 있고, ‘유재석 캠프’와 ‘기안장’처럼 손님을 먹이고 재우는 ‘남을 위한 고생’이 있다. ‘체험 삶의 현장’ 시절 땀이 노동의 소중함을 가르쳤다면, AI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금의 땀은 사람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증거가 됐다. 카메라는 이들의 땀방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넷플릭스 측은 “출연진은 물론 일반 숙박객까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관찰 카메라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배치했다”고 귀띔했다.
AI가 노동을 효율과 생산성의 문제로 바꾸는 시대, 예능은 오히려 노동의 비효율적인 순간에 주목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순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는 순간 등과 같이 말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AI가 매끄럽고 오차 없는 결과물을 1초 만에 만들어내는 시대에 대중은 역설적으로 땀 흘리고, 실수하며, 한계에 부딪히는 인간의 육체적 결함에서 묘한 위로를 얻는다”며 “과거의 예능이 노동을 통해 교훈이나 감동을 쥐어짜려 했다면, 지금의 고생 예능은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생명력과 날것의 반응 그 자체를 감상하는 하나의 스펙터클이 됐다”고 분석했다.
이들 프로그램은 고생을 통해 성취를 증명하기보다, 고생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과 관계를 포착한다. 때문에 출연진이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를 중요하게 본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최근 출연진의 꾸밈없는 모습이 드러나는 리얼리티 예능을 향한 시청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솔직하고 진정성 있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노동 예능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시청 형태가 이어지는 것”이라며 “출연진과 노동 형태가 지닌 본연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담길 수 있도록 제작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등 촬영 방식에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