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영 스위스 디지털 애셋 허브 대표

헤럴드경제가 디지털자산 정책, 기술, 시장을 둘러싼 전문 식견을 담은 ‘크립토 인사이트’를 선보입니다. 디지털자산 시황, 글로벌 최신 이슈 및 제도권 편입 흐름 등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현안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제공합니다. ‘크립토 인사이트’는 복잡한 시장 구조를 명쾌하게 이해하고 디지털자산의 미래 가치를 가늠하는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

2026년 10월 말, 스위스 루가노에서 열린 ‘Plan ₿ Forum’에서 전통 금융의 변화를 보여주는 발표가 나왔다. 루체른 칸토날은행은 자사 연기금이 2025년 말부터 비트코인을 직접 보유하고 있으며, 은행의 수탁 인프라로 관리한다고 밝혔다. 연기금 이사회의 승인과 투자규정 개정, 위험평가를 거친 결정이었다. 디지털자산이 단기 매매를 넘어 장기 자산배분의 대상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신호다.

루가노는 세계적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테더(Tether)와 함께 비트코인 결제와 창업·교육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스위스가 디지털자산 금융의 선도국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기술혁신과 함께 제도적 신뢰를 구축해 온 역사가 있다.

출발점 중 하나는 추크(Zug)의 ‘크립토밸리’다. 이더리움 재단을 비롯한 블록체인 기업과 재단이 집결했고, 추크시는 2016년 비트코인으로 일부 행정 수수료를 납부하도록 허용했다. 기업 유치와 생활 속 실험이 동시에 이뤄졌다.

스위스 금융시장감독청(FINMA)은 2018년 ICO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토큰을 지급형·기능형·자산형으로 구분했다. 새로운 기술을 일률적으로 금지하거나 무조건 허용하는 대신 경제적 기능과 위험에 따라 기존 금융법을 적용한 것이다. 혁신의 예측 가능성을 높인 결정이었다.

그해 21Shares의 전신인 아문(Amun)은 스위스 증권거래소 SIX에 세계 최초의 복수 암호자산 지수 상장지수상품(ETP)을 상장했다. 2019년에는 시그넘(Sygnum)이 세계 최초의 디지털자산 전문은행으로 은행 인가의 효력을 확보했고, 세바(SEBA·현 AMINA Bank)도 같은 해 인가를 받아 제도권 은행 서비스를 시작했다. 암호자산이 규제된 투자상품과 은행업의 영역으로 들어온 전환점이었다.

2021년 시행된 분산원장기술(DLT) 관련 법 개정은 토큰화 증권과 거래 인프라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같은 해 SIX 디지털거래소(SDX)는 토큰화 증권 거래·결제를 위한 금융시장 인프라 인가를 받았다. 유럽연합의 MiCA가 2024년 본격 적용되기 전이다. 다만 스위스는 기존 법체계를 개정했고, EU는 회원국 공통의 암호자산 규칙을 만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스위스의 또 다른 힘은 26개 칸톤의 자율성이다. 추크는 블록체인 기업과 재단의 집적지로, 루가노는 테더와 협력하는 결제 실험 도시로, 뇌샤텔은 기술기업 중심의 생태계로 발전했다. 지역이 서로 다른 혁신 모델을 시험하는 동안 금융업 인허가와 감독은 연방 차원의 공통 원칙을 따랐다.

이러한 변화는 이제 디지털자산 전문기업을 넘어 전통 금융기관으로 확산되고 있다. 은행들은 암호자산 거래와 수탁뿐 아니라 자산관리, 토큰화 증권, 결제 서비스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루체른 칸토날은행 연기금의 비트코인 편입은 그 흐름을 압축해 보여준다. 디지털자산이 기존 금융시스템과 경쟁하는 단계를 넘어 그 안으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토큰증권과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상품 하나의 허용 여부가 아니라 은행·증권사·자산운용사·기술기업이 신뢰할 수 있는 금융 인프라 안에서 연결되는 일이다. 스위스의 교훈은 규제의 부재가 아닌 규제의 진화다. 미래 금융의 경쟁력은 기술을 얼마나 빨리 허용하느냐보다 이를 얼마나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제도로 정착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kyoun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