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워더링하이츠’, 韓 작가·작곡가 세계 초연

‘위대한 개츠비’ 누적 매출 1억4000만달러 불구

제작비 상승에 손익 분기는 2027년에나 가능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오디컴퍼니 제공]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오디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꿈이 아니라 머니야. 돈, 돈.”

브로드웨이 입성을 앞둔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슈버트 극장주에게 “브로드웨이는 내 꿈”이라고 털어놓자 돌아온 답변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극장 17곳을 거느린 슈버트 오거니제이션은 미국 공연계의 최대 극장 기업이다. 그의 칼날 같은 한마디는 오랫동안 신 대표의 귓가에 맴돌았다.

한국 제작자로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단독 리드 프로듀서가 된 신 대표는 ‘꿈의 무게’만큼이나 ‘돈의 무게’를 아는 제작자가 됐다. 그는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SKY31 컨벤션에서 열린 뮤지컬 ‘워더링하이츠’ 월드 프리미어 제작발표회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하면서 정말 절감했다”며 “브로드웨이를 움직이는 건 결국 커다란 자본”이라고 말했다.

성적표만 보면 성공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2024년 4월 브로드웨이 시어터에서 막을 올려 지난 9월 17일 1000회 공연을 넘어섰다. 브로드웨이 공연 전문지 플레이빌에 따르면, ‘위대한 개츠비’는 지난달 25일까지 누적 매출은 약 1억4610만 달러(한화 약 1959억 원)를 기록 중이다. 지난 1일까지 한 주 매출은 86만 달러(약 11억5000만 원), 객석 점유율은 79%였다.

하지만 신 대표가 이 공연으로 떼돈을 번 건 아니다. 사전 제작비만 2500만 달러(약 335억 원)에 달하는 데다 극장 대관료와 출연료로 매주 80만~100만 달러가 빠져나가다 보니 1000회 이상 공연을 해도 정작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거의 없다. 이에 제작사는 개막 직후 1년 안팎으로 내다봤던 손익분기 시점을 이제 2028년으로 늘려 잡았다.

“다들 성공한 프로듀서라며 자부심을 가지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늘 고개를 갸웃합니다. ‘나 성공했는데 왜 주머니가 안 차지?’”

한국에서도 공연의 성공 기준은 매출과 손익분기점에 두지만, 신 대표가 꺼내는 셈법은 다르다. 그는 “현실의 주머니는 가볍지만, 무형의 자산은 몇조일 수 있다”고 했다. 리드 프로듀서로 작품의 창·제작에 관여하고, 전 세계 공연권을 쥔 대형 IP(지식재산권) 및 브로드웨이의 성공적 입성 이후 현지에서 쌓은 네트워크, 그리고 신 대표 자신을 향한 시선과 인식이 달라져서다. 그것이 신 대표가 꼽은 ‘무형의 자산’이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중 ‘뉴 머니’ 무대 [오디컴퍼니 제공]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중 ‘뉴 머니’ 무대 [오디컴퍼니 제공]

거듭된 좌절 끝에 안착…‘돈키호테’의 손익계산서

브로드웨이는 신 대표에게 오래 닫혀 있던 문이었다. 2009년 한미 합작 ‘드림걸즈’로 처음 문을 두드렸지만, 브로드웨이 입성은 이루지 못했다. 리드 프로듀서로 나선 투팍 샤커의 음악 뮤지컬 ‘홀러 이프 야 히어 미’(2014)는 본공연 38회, ‘닥터 지바고’(2015)는 23회 만에 막을 내렸다. 회사에는 막대한 적자가 남았고, 신 대표에겐 ‘공연계의 돈키호테’라는 별명이 붙었다. ‘닥터 지바고’가 쓸쓸히 문을 닫은 브로드웨이 시어터는 9년 뒤 ‘위대한 개츠비’가 오픈런을 이어가는 바로 그 극장이다.

재기에 성공한 ‘위대한 개츠비’에도 평단의 시선은 갈렸다. 신 대표 역시 “평단과 기자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관객에게 사랑받았다”고 인정했다. 토니상과 평단의 지지가 곧 흥행이던 공식이 요즘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신 대표의 진단이다. 2025년 4~9월 런던 웨스트엔드 공연에 대해선 “처음부터 기간을 정한 리미티드 런이었고 아주 잘 끝났다”며 “지금은 극장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아픈 손가락은 정작 서울이었다. 2025년 8~11월 GS아트센터 공연은 개막 초반 기계 고장으로 공연이 취소되는 일을 겪었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2025년 3분기 공연시장 티켓판매 현황 분석 보고서’에서 이 작품이 3분기 뮤지컬 티켓 판매액 상위 10편에 들었지만, 공연 초반 대체 배우 교체와 무대 장치 이상으로 부정적 시각이 퍼지면서 기대만큼의 티켓 판매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뉴욕과 런던을 거쳐 ‘금의환향’한 무대치고는 관객들의 호응이 뜨뜻미지근했던 셈이다.

시장도 얼어붙었다. 신 대표는 “브로드웨이는 제작비가 너무 올라 웬만한 매출로는 공연을 이어가기 힘든 구조”라며 “여기에 2025~2026년엔 시장 전반이 가파르게 둔화했다. 세상이 험악하다 보니 관광객이 공연을 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가장 무거운 짐은 사전 제작비가 아니라 매주 나가는 운영비다. 신 대표가 체감하는 제작비 수준이 상당하다. 그는 “브로드웨이를 100으로 놓으면 웨스트엔드가 80, 한국이 70 안팎”이라며 “한국도 어마어마하게 올랐다”고 귀띔했다. 토니상 3관왕 ‘캣츠: 더 젤리클 볼’이 개막 넉 달 만인 지난 8월 막을 내리자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신작의 ‘지속 불가능한 비용’을 정면으로 거론한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오디컴퍼니 제공]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오디컴퍼니 제공]

브로드웨이 대신 한국 창작가…서울서 여는 세계 초연

신 대표가 다음 카드로 꺼낸 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다. 소설 원제를 그대로 가져온 ‘워더링하이츠’(2027년 1월 26일 개막,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는 내년 2월 28일까지 서울에서 세계 초연한다. 브로드웨이·웨스트엔드를 겨냥한 작품을 서울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신 대표는 “지금까지 개발한 작품의 월드 프리미어는 대부분 뉴욕이나 외국에서 했다”며 “이 작품만은 서울에서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유는 무엇보다 작품의 뼈대가 한국산이어서다. ‘워더링하이츠’의 극본과 가사는 ‘팬레터’, ‘배니싱’의 한재은 작가가 쓰고, 음악은 작곡가 조우인이 맡았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위대한 개츠비’는 기획만 신 대표가 했지, 작품 내용은 작곡가 제이슨 하울랜드, 극작가 케이트 케리건, 연출가 마크 브루니 등 주로 미국 창작진의 손에 태어났다.

특히 이 작품의 작곡을 맡은 조우인은 한양대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뉴욕에서 유학했다. 2021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스페셜 5’로 창작뮤지컬상을 받았지만, 대극장 무대가 주목한 ‘히트메이커’는 아니다. 신 대표 스스로도 “아직 메인스트림에 올라온 작곡가는 아니다”며 “이 친구의 음악성을 오래전에 알아봤다”고 했다. 새로운 작곡가의 발굴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2020년부터 대본과 음악을 함께 써 왔다. 2022년 2월과 8월, 2023년 12월 세 차례 국내 워크숍에서 서사와 음악의 상당 부분을 완성, 해외 창작진은 지난 9월 4차 워크숍부터 합류했다. ‘아멜리’로 올리비에상 후보에 오른 영국 연출가 마이클 펜티먼, 무대 디자이너 맥스 존스, ‘라이프 오브 파이’로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받은 조명 디자이너 팀 루트킨이 이름을 올렸다. ‘위대한 개츠비’를 작곡한 하울랜드는 이번엔 음악 슈퍼바이저로서 편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을 맡는다.

신 대표는 “‘위대한 개츠비’ 때는 영어 대본을 한 줄 한 줄 붙잡고 싸우느라 힘들었다”며 “한국 작가들과 작업하니 서사의 밀도와 감정선이 층층이 쌓이더라”고 했다. 작품은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파괴적 사랑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딸 캐서린과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엄마 캐시와 딸 캐서린은 한 배우가 1인 2역으로 연기한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오디컴퍼니 제공]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오디컴퍼니 제공]

“100% 팔아도 수익 안 나”…5주 공연은 ‘R&D’

국내 뮤지컬은 대개 짧은 셋업 끝에 곧바로 막을 올린 뒤, 무대 위에서 수정을 거듭하며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초연을 마친 뒤 재연에서 넘버와 장면이 바뀌는 일도 흔하다. 브로드웨이는 다르다. 신작은 본공연에 앞서 비영리 극장 등에서 하는 트라이아웃(시범 공연)을 통해 연출과 디자인, 안무 등을 무대에서 실제로 구현해 본 후 수정 과정을 거쳐 관객을 맞는다.

‘워더링하이츠’는 브로드웨이식 제작 방식을 한국 여건에 맞게 들여왔다. 오디컴퍼니는 CJ토월극장을 석 달간 빌렸지만 관객 앞에 서는 기간은 5주뿐이다. 나머지 두 달은 무대 셋업과 기술·드레스 리허설, 비공개 프리뷰에 쓴다. 공개하지만 않을 뿐, 그 두 달이 곧 트라이아웃 역할을 한다. 개막일엔 그 과정을 모두 거친 완성된 공연을 내놓겠다는 구상이다.

신 대표는 “보통은 빨리 셋업하고 곧장 프리뷰에 들어가 그사이 수정·보완하는 폭이 크지 않다”며 “1월 26일은 완성된 작품을 선보이는 날”이라고 했다. 개막 날엔 “냉정하게 평을 받겠다”는 각오도 내비쳤다.

수지가 맞을 리 없다. 신 대표는 “솔직히 말하면 (티켓을) 100% 팔아도 수익이 나지 않는다”며 “티켓 가격을 올려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일찌감치 결론 내렸다”고 했다. 지난 몇 년 사이 제작비 급증으로 티켓가격이 부쩍 뛰고 있지만, 신 대표는 ‘워더링 하이츠’는 적정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비쳤다. 그는 이 비용을 IT(정보기술)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에 빗댔다. 사전 제작비는 이후 장기 공연을 통해 회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서울 다음 목적지는 원작의 고향인 런던 웨스트엔드다.

‘워더링하이츠’는 오디컴퍼니가 2027년 내놓을 세 편의 신작 중 첫 작품이다. 3월엔 미국 샌디에이고 올드 글로브에서 ‘어거스트 러쉬’를, 5월엔 뉴욕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AM)에서 ‘라이온 킹’ 연출가 줄리 테이머와 손잡은 ‘위대한 망상’을 연이어 세계 초연한다. 미국 정상급 비영리 극장들이 문을 연 건 “‘위대한 개츠비’의 성공이 가져다준 기반”이라고 신 대표는 말했다. 손익계산서에 적히지 않는 무형 자산이 다음 작품의 길을 터 준 셈이다.

돈키호테처럼 달려드는 신 대표는 “예전엔 성공한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면서도 “지금은 결과가 무섭다. 공연이 다가올수록 더 무섭다”고 했다. 그럼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명징하다.

“요즘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번아웃이 올 듯 말 듯해요. 그래서 밤마다 걸어요. 걸으면서 생각하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그래,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지.”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