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정기적으로 해오던 일을 멈추거나 규모를 키우는 것 자체가 전략의 변화이거나 메시지인 경우가 있다. 세계적인 금융 집단들이 최근 보여주고 있는 행태들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메시지일 수 있다.
HSBC(홍콩상하이은행)는 2025년 7월, 지정학적 위험을 분석하고 최고경영진과 고객들에게 자문해주던 ‘지정학 리포트 전담 팀(Geopolitical Risk Team)’을 전격 해체했다. 비슷한 시기(2025년 5월) JP모건(JPMorganChase)은 ‘지정학 센터(JPMorganChase Center for Geopolitics)’를 신설하며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당시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관세전쟁, 미국과 동맹국들 간의 갈등을 비롯한 지정학적 긴장이 커가면서 세계적인 금융기관들의 지정학 리포트나 견해들이 점점 더 주목받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거대 금융 기관들의 행보가 무엇을 의미하냐를 놓고 억측이 난무했다.
HSBC와 JP모건은 각각 비미국(유럽·아시아)과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금융기관이자 시장 정보 제공자다. 이들을 비롯한 글로벌 거대 금융기관들은 대부분 지정학을 활용해 부를 일궜다. 나폴레옹 전쟁과 청일 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이들이 보인 전쟁 채권 발행과 인수 등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냉전 종식 이후에는 브릭스(BRICS)와 같은 다양한 신조어를 만들어 신흥국 시장이라는 개념을 확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신조어를 활용한 ‘지정학 리스크 지수’나 ‘신흥국 정치 불안정성 보고서’ 등을 만들어 다양한 마켓팅을 진행했다. 금융과 지정학을 결합해 투자와 인수·합병 등에 전략적 자문을 수행했고, 금리와 차관 조성 등에 관여했다.
이러한 실력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HSBC는 1865년 홍콩과 상하이에서 문을 연 이래 아시아의 정보와 통상권 장악을 위한 영국의 정보 수집 창구 역할을 했다. HSBC의 현지 지점장들은 단순한 은행원이 아니라, 금융을 매개로 청나라 조정의 핵심 관료, 지역 군벌들과 밀착하여 정보를 얻어냈고 이를 분석했다.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등 금융사 연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영국 런던의 외교가로 실시간 공유됐고, 영국 정부가 차관(국가 대출)을 무기로 아시아의 이권을 침탈하는 지정학적 무기로 작동했다.
미국의 JP모건 역시 중남미 자원 개발과 철도 부설 과정에서 미국 정부의 외교 정책(먼로주의)을 막후에서 설계하는 전략가 역할을 했다. 1903년 콜롬비아 정부가 미국의 운하 건설 조약을 거부하자, JP모건과 미국 정부는 막후에서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의 독립 혁명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독립 직후 신생 파나마 정부는 미국에 운하 지대와 철도의 영구 지배권을 넘겼고, JP모건은 이 과정에서 파나마 정부의 재정 대리인 역할을 맡으며 막대한 금융 이익을 챙겼다.
그런데 이런 은행들, 특히 HSBC가 지정학 분석을 중단한다고 하니 이러한 행동이 강력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HSBC는 지정학적 침묵을 단행하기 전 그들이 19%를 보유하고 있던 중국 교통은행의 지분에 대한 대규모 상각(Write-down)을 단행한다. 시기는 2024년 2월과 2025년 7월 두 차례로 각각 30억 달러와 21억 달러 규모였다. 두 차례의 회계상 손실 처리(총 51억 달러 규모)로 인해 당시 HSBC의 분기 순이익은 급감했고 주가가 폭락했다.
당시 상각은 공식적으로는 중국 내부의 부동산 시장 붕괴와 이로 인한 중국 은행들의 대출 부실화(NPL 증가) 때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중국의 ‘일대일로 부실’과의 연관성에 대한 의구심도 동시에 제기됐다. 중국 은행들은 일대일로 사업을 위해 스리랑카, 파키스탄, 아프리카 국가 등에 막대한 인프라 대출을 집행했다.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한 지 10년이 된 2023년 이미 그 규모가 1조 달러 정도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이 대출을 갚지 못하는 ‘채무 위기’에 빠지면서, 중국 국유 은행들의 자산 건전성에 균열이 생겼고 이것이 HSBC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일대일로 연관성에 대한 의심의 근거다.
미국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의 싱크탱크 ‘에이드데이터’(AidData)가 발표하는 중국 해외 대출 및 지원 관련 자료와 2023년에 발간한 일대일로 관련 보고서(Belt and Road Reboot: Beijing’s Bid to De-Risk Its Global Infrastructure Initiative)에 따르면 1조 달러의 대출금 중 절반 이상이 10년이 지나면서 원금 상환 기간에 진입했다. 또 2030년까지 대출금의 75%가 원금 상환 기간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됐다. HSBC는 현재까지도 상각과 일대일로와의 연관성에 대해 말을 아끼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HSBC는 대규모 상각과 병행해 2024년 10월 22일, 조직 구성을 ‘동방 시장(Eastern Markets)’과 ‘서방 시장(Western Markets)’이라는 지리적 축으로 이원화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중국계 대주주(핑안보험)의 요구대로 결국 아시아 사업부를 분리 매각(스핀오프)하려는 전 단계가 아니냐는 의혹이 강하게 일었지만 HSBC는 이를 부인했다. 2025년 3월에는 의혹을 완화하려 명칭을 ‘아시아·중동’ 및 ‘유럽·미주’로 재차 변경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한 지난 1~2년간 글로벌 금융기관들이 취한 전략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그 핵심은 ‘파편화를 통한 헤징’이었다. HSBC는 서구권 자산을 매각하고 아시아와 중동으로 거점을 옮기는 ‘아시아 중심 정책’을 가속화했고, 모건 스탠리를 비롯한 월가 금융기관들은 중국 내 데이터와 인프라를 글로벌 네트워크로부터 격리하는 ‘방화벽’을 세웠다. JP모건은 미국의 지정학 전략에 호응해 2025년 10월 미 국가 경제 안보와 회복력에 중요한 산업에 향후 10년간 총 1조5000억달러 규모의 금융을 제공하고 투자하겠다는 ‘안보·회복력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다. 그 후 첫 1년간 총 2300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에 금융을 제공했다.
HSBC는 지정학적 침묵을 선택했지만 중국 시장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그 부실의 비용을 재무제표로 흡수했다. 동시에 중국이 글로벌 사우스에 구축한 ‘디지털 실크로드(AI·5G)’ 사업의 대출 등을 주선하면서 이익을 올리고 있다. 상업적 행위자의 관점에서 이는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 위험을 분산하는 완벽한 리스크 관리 기법처럼 보인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국유은행(공상은행, 교통은행 등)들이 입은 수십억 달러의 손실은 금융 시장의 관점에서는 ‘부실’이다. 하지만 지정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돈은 글로벌 사우스라는 거대한 미래 시장과 외교·안보적 우군을 사기 위해 지불한 일종의 ‘비용’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중국이 이 비용을 혼자 치르지 않고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활용해 헤징을 했다는 것이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면서 글로벌 금융기관들은 물론이고 글로벌 제조 및 혁신 기업들도 미·중 양국으로부터 동시에 압박을 받는 ‘샌드위치’ 신세다. 미국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대중국 투자를 제한하고, 중국은 데이터 보안법과 반간첩법 등으로 외국계 기업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기술과 금융 데이터가 안보 무기가 되면서, 글로벌 금융 기관들과 제조 및 혁신 기업들은 중국 내 서버와 데이터 센터 및 공급망을 글로벌 네트워크로부터 이원화하거나 물리적·법적으로 격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미국 정부의 제재 명단(SDN)과 중국 정부의 외국 제재 반대법(Anti-Foreign Sanctions Law)이 충돌할 때, 기업들과 은행들은 양쪽 모두에서 처벌받을 수 있는 극단적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 국회의 주미국 대사관에 대한 2026년 10월의 국정감사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한국계 기업들도 지정학적 리스크 부담에 점점 크게 직면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이러한 리스크들로 인해 동맹인 미국 기업과의 비즈니스 거래도 때로는 주저하게 되고, 그것이 안보와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상황들이 점점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
과거에는 주로 미국과 유럽 등이 발동하는 경제 제재에 대한 ‘참여의 이익’이 ‘불참의 이익’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블록) 시장의 규모와 중국(블록) 시장의 규모가 점점 격차가 줄어들면서 기업들의 고민은 커지고 있다.
특히 금융 기관들의 입장에서는 지금은 미·중 양국 정부가 금융을 상대방을 때리는 무기(Sanction)로 활용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의 빈도수가 점점 커질 것이다.
HSBC의 ‘선택적 침묵’은 이러한 상황을 상업적으로 회피하자는 게 주된 이유일 수 있다. 미국계 거대 금융기관들의 데이터와 시스템 분리 등은 미·중 양국의 규제 충돌로 인해 과거처럼 ‘하나의 통합된 글로벌 시스템’으로 은행을 운영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가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한국의 기업들, 금융 기관들은 미중 패권 경쟁과 글로벌화의 2차 파고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지정학적 위험에 대비하고 있을까? 그럴 거라 믿지만 진정한 경쟁력을 고민할 때 너무 국내적 시각과 과거의 관성에 갇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커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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