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1월 1일·국립오페라단 ‘라인의 황금’
바그너의 제단에 목을 내놓은 두 거장
유럽 무대 100회 넘게 선 알베리히 장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장기 투숙의 찌든 내가 진동하는 퀴퀴한 여인숙. 발길 끊긴 방 하나를 빌려 사는 남자가 있다. 헝클어진 체모와 오물을 뒤집어쓴 채 팬티와 샤워 가운만 걸친 사내는 짐승처럼 웅크인 채 미동도 않는다. 심연을 진동케 하는 단 하나의 낮은음이 세계를 길어 올리는 4분의 서곡. 관객의 시선은 철저히 유린당한다.
라인강의 낭만은 거세됐다. 무대 위로 난입한 두 명의 카메라맨은 남자의 번들거리는 땀방울과 경련하는 안면 근육을 바짝 쫓는다. 바닥에서부터 올려 찍은 난쟁이의 기괴한 몸뚱이는 무대 뒤 스크린을 집어삼키는 거인으로 부풀어 오른다. 현금다발이 허공을 찢고 흩날리는 사이, 반지를 강탈당한 남자는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다. 니벨룽족의 난쟁이, 자본주의의 민낯을 뒤집어쓴 ‘탐욕의 화신’ 알베리히다.
“원래 서곡엔 알베리히가 나오지 않아요. 시작부터 등장하기는 저도 처음이에요.” (사무엘 윤)
알베리히의 옷을 입은 것만 해도 100번은 족히 넘는다. 그런데도 사무엘 윤은 “지금껏 경험한 모든 연출을 통틀어 비슷한 것조차 없다”고 말한다. 유럽의 심장부에서 수도 없이 바그너 무대를 호령해 왔음에도 이번엔 ‘처음’인 것이 적잖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과 바리톤 양준모는 국립오페라단이 2029년까지 4년에 걸쳐 자체 제작하는 역사적 링 사이클의 서막 ‘라인의 황금’(10월 29일~11월 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선다. 작품의 무게중심은 두 사람이 맡은 난쟁이 알베리히에 온전히 쏠려 있다. 다른 신과 영웅들이 4부작 전체에 걸쳐 겪어내는 흥망성쇠를 알베리히는 단 한 편 안에서 모조리 마주한다. 사무엘 윤이 “‘라인의 황금’에선 알베리히가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한국인에겐 절대 주지 않는 역”… 피로 쓴 자음의 기록
“독일 사람들은 알베리히를 한국 사람한테 절대 안 줘요. 보탄도 어렵지만, 알베리히는 더더욱 안 줍니다.” (사무엘 윤)
알베리히는 지하 세계 니벨하임에 사는 니벨룽족 난쟁이다. 4부작의 첫 작품 ‘라인의 황금’에서 알베리히는 사랑을 포기한 대가로 라인강 처녀들의 황금을 빼앗아 니벨룽족을 지배하는 권력자가 된다. 알베리히는 가창 못잖게 ‘언어의 타격감’이 지배하는 캐릭터다. “모음의 유려함을 타고 흐르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바그너의 가창은 독일어 자음이 관객의 고막을 먼저 찢고 들어와야만 비로소 서사가 살아난다”고 양준모는 설명한다.
100명 안팎의 관현악이 겹겹이 쌓인 바그너의 심포니 위에선 더더욱 그렇다. 양준모는 “침 뱉듯 자음을 확실하게 뱉어주지 않으면 소리가 오케스트라에 묻혀 아예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목소리 좋기로 정평이 난 한국 성악가들이 유럽 무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지적이 있다. “안 들린다”는 것이다. 사무엘 윤은 “언어 감각이 몸에 배어 있지 않으면 성악가의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목소리가 날아갈 수 있는 위험한 역”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알베리히를 ‘바그너의 무덤’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보에 적힌 알베리히의 기괴한 웃음은 정상적인 호흡으로는 결코 밀어낼 수 없는 비발성적 광기다. 양준모는 “한 번 부르고 나면 성대를 칼로 쓱 긁는 느낌”이라고 했다. 실제로 양준모는 이 역할의 데뷔 무대 오케스트라 리허설 당시 1장을 마치고 3장에 들어설 때 목이 나갔다고 회고한다.
양준모에게 첫 알베리히는 예술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였다. 2000년대 중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막 졸업한 무렵이었다. 오디션마다 낙방하고 비자 만료는 턱밑까지 다가온 때, 오스트리아 시골 극장의 ‘세비야의 이발사’로 가까스로 데뷔한 양준모에게 그 무대의 연출가가 불쑥 알베리히 오디션을 제안했다. “알베리히가 대체 뭐냐고 물었을 정도였다”고 양준모는 그때를 돌아본다. 벼랑 끝에서 홀로 익혀 간 악보는 첫 연습에서 “다 틀렸다”는 지휘자의 냉혹한 한마디에 무너졌다. 지휘자는 양준모를 붙잡고 꼬박 한 달을 가르쳤다. 그 시절의 종이 악보를 양준모는 지금도 펼친다. 수없이 넘겨 찢긴 자리마다 테이프를 덧대고, 밥 먹다 흘린 김칫국물이 깊게 밴 누더기 악보다. “정말 사랑하지만 저를 너무나 힘들게 했어요. 그래서 제겐 애증의 배역이에요.”
사무엘 윤에게 알베리히는 옭아매던 사슬을 끊어낸 탈출구였다. 2012년 바이로이트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무대에 선 이후 세계의 극장들은 사무엘 윤에게 홀랜더만 청했다. 150번 가까이 바다를 떠돌아야 했다. 바이로이트 리허설이 끝날 때마다 다섯 명의 음악 코치가 따라붙어 퍼붓는 ‘자음 공격’과 “성악가처럼 부르지 말라”는 주문에 질려 도망치고 싶다 여기던 무렵이었다. 그때 시카고 리릭 오페라가 알베리히를 내밀었다. “이것까지만 하고 바그너를 끝내자”며 오른 2016년 무대는 기적 같은 반전을 가져다줬다.
“그만두고 싶던 마음이 알베리히를 만나 뚫려 버렸어요. 제 안에서 이토록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죠.” (사무엘 윤)
같은 배역을 입었으나, 두 사람의 알베리히는 질감부터 다르다. 베이스바리톤의 심연을 울리는 묵직한 저음과, 바리톤의 벼린 칼날 같은 고음. 사무엘 윤은 바그너가 “자신의 모든 철학을 투영하고 싶은 배역일수록 음역을 넓게 썼다”고 설명한다. 그 넓은 음역 위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무엘 윤은 “한 문장 안에서도 제가 무게를 두는 단어와 양 선생님이 방점을 두는 단어가 다르다”며 “꼭 두 번 다 보셔야 한다”고 웃었다. 양준모가 꼽은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힘의 분배다.
“선생님은 무대에 오를 때마다 100%를 다 보여주세요. 저는 아끼면서 불러요. 하루 쉬고 다음 날 또 무대에 서야 하니까요.” 곁에 있던 사무엘 윤이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나도 똑같아.”
쉴 곳을 빼앗긴 알베리히, 폭력의 바통을 넘기다
이번 무대는 알베리히에게 1초의 숨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무대 위에선 라이브 카메라가 쉼 없이 돌아간다. 함께 오른 카메라맨들은 알베리히를 끝까지 쫓아 백스테이지에서의 모습까지 담아낸다. 무대 앞뒤에 도사린 고정 카메라까지, 사각지대 없는 렌즈는 가수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마저 스크린에 박제한다. 양준모는 “무대 뒤로 몸을 숨겨 물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 하는데, 카메라가 쫓아다니니 그럴 틈조차 없다”고 털어놨다.
소위 ‘얼빡샷’(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까지 소화해야 하는 실시간 영상 무대는 두 사람도 처음이다. 사무엘 윤은 “해외에서도 이런 연출적 시도는 관객의 호불호가 정확히 50 대 50으로 갈린다”고 했다. 영상이 노래의 아우라를 넓힐지, 시선을 흩뜨릴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연기 장인’으로 일컬어지는 두 성악가이기에, 대형 스크린을 통해 2283석 객석의 맨 뒷자리까지 전달될 농밀한 감정과 눈빛 연기는 기대 요소다. 바그너를 부를 때면 비 오듯 쏟아지는 땀, 조명 아래 분무기처럼 흩어지는 비말, 여기에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과 불타는 눈동자는 이 작품의 백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처절한 신체적 고통이 화면을 통해 송출되면, 관객분들도 ‘아, 저 성악가들이 참 열심히 일해서 먹고사는구나’ 하고 알아주시지 않을까요.” (양준모)
두 사람은 이 배역을 위해 ‘육체의 허울’마저 미련 없이 버렸다. 둘 다 수염을 거칠게 길렀다. 가발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사무엘 윤도 이번엔 기꺼이 가발에 자기 머리털을 섞었다. 온몸에 접착제로 털과 오물을 붙이는 데 2시간, 피부가 짓무르도록 떼어내는 데 또 2시간이 걸리는 날들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알베리히의 유머는 완전히 지워졌다. 권세를 얻어 의기양양한 알베리히가 두꺼비로 변신하는 ‘위트의 순간’조차 이번 무대에선 잔혹과 난폭으로 치환된다. 많은 연출이 반지를 빼앗기는 대목에서 알베리히의 손가락을 자르지만, 이번엔 그보다 더 비참한 파멸을 맞는다. 양준모는 이번 무대가 알베리히의 욕망과 폭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유를 “그 바통을 나중에 보탄에게 넘겨주기 위한 초석을 깔아두는 것”이라고 봤다. 신들의 왕 보탄이 4장에서 알베리히를 철저히 짓밟고 유린하는 장면은, 절대신이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을 고스란히 넘겨받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공연은 목·금·토·일 나흘. 두 사람은 하루씩 번갈아 무대에 서는 강행군을 소화한다. 사무엘 윤은 “이 배역은 다른 오페라의 다섯 배, 메피스토펠레스의 세 배는 힘든 역”이라고 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사무엘 윤이 숱하게 불러온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속 악마다. 유럽의 제작극장에선 무거운 바그너 사이사이 가벼운 희극을 끼워 넣어 가수의 성대를 보호하고, 공연을 한 달에 걸쳐 여유 있게 배치해 관객이 두 알베리히를 서너 번씩 교차 관람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국내 오페라 제작 여건은 속전속결이다. 전용 극장이 없는 국립오페라단에선 제약 속에서 모두가 ‘영혼’을 갈아 넣는다. 사무엘 윤 역시 현실적 제약 앞에서 “참 안타깝다”고 했다.
그럼에도 녹초가 된 두 사람을 ‘지옥의 무대’로 다시 끌어올리는 것은 다름 아닌 바그너의 음악이다. “바그너가 차려놓은 4시간 짜리의 거대한 심포니”에 앉아 성악가는 그저 한 끼 나누면 된다고 양준모는 말한다. “하지만 숟가락이 굉장히 무겁다”고 한다. 밥 한술 뜨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분장을 지우는 동안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자조하다가도,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지진이 난 듯 심포니가 무대를 집어삼키는 순간이 찾아오면, 이성은 마비된다.
“그 지옥불 같은 저주의 음악이 울려 퍼지면, 하길 참 잘했다, 이 전율 때문에 수명을 갉아먹으며 이걸 하는구나 싶죠. 바그너는 마약과도 같아요.” (사무엘 윤)
두 사람이 가는 길은 곧 이정표이자 디딤돌이다. 양준모는 “저희가 초석이 돼 길을 닦아두면 유럽에서 활동하는 후배들도 잘 따라올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목을 기꺼이 바그너의 제단에 내어놓은 두 거장의 알베리히를 한 무대에서 번갈아 만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해외 관객들의 몫이던 호사가 이번엔 한국의 오페라 관객들을 찾아온다.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걸 쏟아부을 겁니다. 저희의 알베리히를, 언제 또 한국에서 보실 수 있겠어요. (웃음)” (사무엘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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