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메이로: 불, 어느 아카이브’

사회적 망각과 신체적 기억 탐구

12월 27일까지 아트선재센터 전시

‘고이즈미 메이로: 불, 어느 아카이브’ 전시 전경. [사진=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고이즈미 메이로: 불, 어느 아카이브’ 전시 전경. [사진=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일본 사람으로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작업은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26일 아트선재센터에서 만난 일본 작가 고이즈미 메이로는 국내 첫 미술관 개인전 ‘고이즈미 메이로: 불, 어느 아카이브’에 대해 이같이 소개했다.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두 달간 열리는 이번 전시는 과거의 역사가 집단적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지는 ‘사회적 망각’에 주목한다. 전쟁과 국가주의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전달하지만, 그 사건을 통과한 사람들이 겪은 신체적·정서적 경험까지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이러한 간극 사이에서 작가는 목소리와 몸짓, 비자발적인 신체 반응에 남은 기억의 흔적을 따라간다. 신체는 과거를 단순히 재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식적인 기록 바깥에 놓인 경험이 현재에 모습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아카이브가 된다.

고이즈미는 이미지와 사물, 목소리와 지각을 통해 기록과 기억의 불완전한 관계를 탐색한다.

‘안개 #25’(2026)와 ‘안개 #27’(2026)은 얼굴이 지워진 인물을 목탄으로 그린 작품이다. 일본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속 장면을 목탄으로 옮긴 뒤 일부를 지워 영화에서 직접 드러나지 않는 전쟁의 흔적을 환기한다.

고이즈미 메이로 ‘안개 #27’(왼쪽), ‘안개 #25’. [사진=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고이즈미 메이로 ‘안개 #27’(왼쪽), ‘안개 #25’. [사진=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3채널 영상 ‘증언의 천사들’(2019)에서는 과거 참전 군인의 증언이 젊은 참여자들의 낭독을 통해 현재에 다시 발화된다. 두 화면 사이에 놓인 모니터에는 해당 증언의 당사자 곤도 하지메(1920~2021)의 인터뷰가 재생된다. 곤도는 70세가 넘어서 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가 일반 시민을 학살하거나 여성을 성폭행한 일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고이즈미는 “촬영 당시 99세였던 곤도는 과거 본인이 증언한 폭력 행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터뷰 끝에 가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기는 절대 용서를 받지 못할 것 같다는 말로 끝냈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영상에서 노쇠한 곤도의 말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표정과 몸짓에서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드러난다. 참여자들의 긴장된 몸과 머뭇거림은 과거의 목소리를 다시 발화하는 일이 당시 경험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과는 다름을 보여준다.

고이즈미 메이로 ‘비의(秘儀)’. [사진=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고이즈미 메이로 ‘비의(秘儀)’. [사진=남서원. 아트선재센터 제공.]

자동차 엔진에 신체 일부를 본뜬 형상을 결합한 조각 ‘비의(秘儀)’(2026)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탐색한다. 작가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몸이 하나의 기계적 시스템이나 사물, 데이터와 패턴의 집합으로 이해되는 방식에 관심을 가져왔다. 작품은 기술의 진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인간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희생하고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을 제의적인 관점으로 풀어낸다.

가상현실(VR) 작품 ‘불을 가져오는 프로메테우스’(2023)는 생명공학의 발전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시각과 지각을 상상하며 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변형되는 신체를 조명한다.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에서 출발해 기술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와 감각,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까지 바꿀 수 있는 미래를 표현한다.

고이즈미는 도쿄 국제기독교대학교와 영국 첼시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과 퍼포먼스를 전공한 뒤, 암스테르담 라익스아카데미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영상, 퍼포먼스, VR을 넘나들며 은폐된 역사적 기억, 국가주의, 역사가 기억되고 이해되는 방식을 규정하는 사회적·심리적 조건화를 탐구해 왔다. 2021년 ‘증언의 천사들’로 영국 최대 현대미술상인 아르테스 문디 9상을 공동 수상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 테이트 모던 등 세계 주요 미술 기관에서 개인전 및 프로젝트를 개최했으며, 리버풀 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상하이 비엔날레 등 주요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pin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