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서면 인터뷰

헬싱키필하모닉, 144년 만에 첫 내한

22일 롯데콘서트홀서 양인모와 협연

헬싱키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롯데문화재단 제공]
헬싱키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롯데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1899년 4월 26일, 헬싱키. 서른세 살의 장 시벨리우스가 지휘대에 올랐다. 팀파니가 낮게 웅얼거리는 심연을 가르고 클라리넷 독주가 외로이 비가를 쌓아 올렸다. 핀란드의 영혼을 응축한 교향곡 1번이 세상에 첫 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악보 위 세계를 처음 빚어낸 건 1882년 태동한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였다. 그로부터 24년, 투술라 호숫가의 집 아이놀라에서, 때론 지중해의 라팔로에서 써 내려간 악보는 늘 헬싱키로 돌아왔다.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같은 악단의 활 끝에서 음표들은 비로소 생동하는 음악이 됐다. 일곱 편의 교향곡 중 헬싱키필을 거치지 않은 초연은 1924년 스톡홀름에서 울린 마지막 7번 하나뿐이다.

“헬싱키 필하모닉은 7번을 제외한 시벨리우스의 모든 교향곡을 초연한 오케스트라입니다.”

144년 역사의 ‘시벨리우스의 분신’이 처음으로 한국 관객 앞에 선다. 오는 2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다. 개관 10주년 기념 시리즈 ‘10 포(for) 10’의 일환으로 열리는 무대다.

악단을 이끄는 거장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70)는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핀란드와 한국 사람들의 공통점은 관현악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라며 “핀란드에선 아마도 시벨리우스 덕분에 관현악이 국가 정체성의 아주 중요한 일부가 됐다”고 했다.

한 교실에 앉았던 세 명의 거장

사라스테와 지휘봉의 인연은 생일 파티에서 시작됐다. 열여덟 살의 전도유망한 바이올린 학도였던 사라스테는 은사의 생일 축하연에서 핀란드 지휘 교육의 대부 요르마 파눌라와 운명처럼 만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파눌라에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파눌라는 단 한 마디뿐이었다. “오디션을 보러 와라.”

그렇게 입성한 시벨리우스 아카데미 파눌라 클래스의 문하생은 단 셋이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사라스테, 훗날 작곡가 겸 지휘자로 LA 필하모닉을 비약시킨 호른 전공의 에사페카 살로넨,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와 2020년부터 3년간 서울시향을 이끌며 한국 관객에게 친숙해진 클라리넷 주자 오스모 벤스케였다. 바이올린과 호른,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세 청년이 한 공간에서 지휘봉의 호흡을 나눈 것이다.

헬싱키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롯데문화재단 제공]
헬싱키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롯데문화재단 제공]

핀란드는 지휘 강국으로 유명하다. 파눌라 클래스를 통해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화수분처럼 나왔다. 거장들부터 현재 전 세계가 사랑하는 서른 살의 클라우스 메켈레까지 지난 40년간 핀란드는 전 세계 악단을 주물러 왔다.

사라스테는 그 비결을 ‘대물림’에서 찾았다. 그는 “앞선 세대가 자기 생각을 다음 세대에 넘겨준 것이 핀란드 지휘가 성공한 큰 이유”라고 말한다. 후학들을 향한 거장의 조언은 간결하고 단단하다.

“자기만의 목소리와 목표를 찾아야 합니다. 지름길이나 쉬운 해법을 찾으려 해선 안 됩니다.”

과장하지 않는 사람들의 음악

핀란드 음악의 광활한 여백은 북유럽의 대자연이 아닌 그 땅을 딛고 선 사람들의 내면에서 번져 나온다. 사라스테의 시선 역시 관념이 아닌 사람으로 향한다.

“핀란드 음악은 핀란드 사람의 기질과 맞닿아 있어요. 핀란드 사람은 외향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향적이지도 않아요. 마음속에 감정을 많이 품고 있지만 과장하지 않죠.”

사라스테와 헬싱키필의 인연 역시 각별하다. 1983년 객원으로 첫 인연을 맺은 지 20년 만인 2023년, 그는 악단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이 됐다. 서울시향 지휘대에도 올라 한국 청중과도 깊은 교감을 쌓았다.

한국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1902)은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신음하던 시절에 초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핀란드인의 희망을 담아낸 민족적 서사시다. 짧은 동기들이 조금씩 모여 마지막 악장의 찬연한 D장조 피날레로 분출한다. 수십년간 이 곡을 지휘한 사라스테는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다만 연주할 때마다 놓지 않는 과제가 있다.

헬싱키필과 협연을 앞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롯데문화재단 제공]
헬싱키필과 협연을 앞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롯데문화재단 제공]

“음악에 담긴 내면의 드라마, 그리고 음악이 끝내 다다를 수밖에 없는 목표를 매번 더 설득력 있게 만들려고 합니다.”

1부를 여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벨기에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을 위해 1905년 쓴 극음악이다. 사라스테는 모음곡 아홉 곡 가운데 ‘성문에서’, ‘멜리장드’, ‘간주곡’, ‘멜리장드의 죽음’ 등 네 곡만 골라냈다. 그는 “각 곡의 성격을 보고 골랐다”며 “네 곡을 엮어 일종의 작은 교향곡처럼 만들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어두운 서주로 문을 열고, 한 여인의 초상과 경쾌한 간주곡을 지나 비극적 결말로 닫히는 ‘15분짜리 교향곡’이다.

두 시벨리우스 사이엔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 놓인다. 사라스테는 “아주 자연스러운 조합”이라고 했다. 1809년부터 1917년 독립 때까지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에 속한 자치 대공국이었다. 사라스테는 “러시아 음악의 영향은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도 발견된다”고 짚었다.

무대에 오를 협연자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다. 2015년 파가니니, 2022년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며 헬싱키필과 이미 깊은 음악적 호흡을 나눈 음악가다. 2022년 5월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닐센 바이올린 협주곡을 함께 연주했고, 그해 12월 ‘핀란드 음악의 날’ 공연에서 다시 호흡을 맞췄다.

당시 헬싱키필은 양인모를 ‘올레그 카간, 빅토리아 뮬로바로 이어지는 역대 시벨리우스 콩쿠르 우승자의 계보를 잇는 협연자’라고 했다. 사라스테는 “자신만의 음색을 지닌, 정말 흥미로운 연주자”라며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협주곡 2번에 더없이 잘 맞는 선택”이라고 했다.

헬싱키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롯데문화재단 제공]
헬싱키 필하모닉을 이끄는 지휘자 유카페카 사라스테 [롯데문화재단 제공]

지휘자 없이 무대에 서는 오케스트라

“아주 넓고, 깊고, 풍부한 소리.”

반세기 역사를 가진 헬싱키필이지만, 그들의 고유한 음색을 정의하는 데는 세 단어면 족하다. 사라스테는 이 단단한 사운드의 토양을 객석과의 호흡에서 찾았다.

“관객의 호기심 덕분에 우리 프로그램엔 제약이 없습니다. 현대음악부터 고전, 후기 낭만주의까지 꽉 찬 객석 앞에서 연주하죠. 그 경험이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엄청나게 키웠습니다.”

헬싱키필은 매년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만난다. 여기에 최근에는 파격적인 예술적 실험을 감행하고 있다. 단원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휘자 없이 포디엄을 비운 채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2026~2028년 시즌에는 수석 객원 지휘자 직함을 외부 음악가가 아닌 ‘오케스트라 자체’에 헌정했다. 외견상 지휘자의 영토가 축소되는 듯하지만, 사라스테의 통찰은 정반대다.

그는 “연주자들이 서로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되고, 오케스트라의 정체성이 더 단단해진다”며 “오히려 지휘자의 일은 훨씬 흥미롭다. 해석의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헬싱키필과 직조해 나갈 미래 청사진 역시 확고하다.

“이 오케스트라의 고유한 정체성을 더 널리 알리고 싶어요. 폭넓은 표현력과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거든요. 같은 곡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연주할 곡이 아직 무궁무진해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