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정상들, 비공개 회담서 ‘트럼프 공개 비판 자제’ 요청할 듯
유럽, 작년 2월 ‘백악관 충돌’ 재연 우려…美 지원 중단 우려
젤렌스키, 브뤼셀서 연쇄 양자회담…유럽에 지원 강화 요청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해 연일 날 선 비판을 쏟아내자 당혹감을 느낀 유럽 지도자들이 자제를 당부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가뜩이나 경색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공개적인 비판으로 더욱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1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정상들은 오는 1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공개 비판 수위를 낮출 것을 요청할 예정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 F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합의한 이른바 ‘경유 거래(디젤 딜)’를 비판하고, 미국의 대(對)우크라이나 정보 지원 중단을 “위험한” 조치라고 지적하는 등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독재자와 초부유층에 본능적인 친밀감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사퇴를 요구한 데 대해서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울러 미국 측의 거듭된 중단 요구에도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겠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을 잇달아 내놓자 유럽 정상들 사이에서는 당혹스러운 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U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반드시 공개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16일 젤렌스키 대통령과 비공개 회담을 가질 예정인 EU 정상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의사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공개 발언 수위를 낮추라는 단호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윳값 상승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우려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러시아산 경유를 수입하기로 푸틴 대통령과 합의하고, 유럽에 러시아 국유 자산의 동결을 해제할 것을 제안하면서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2기 출범 직후인 작년 2월 젤렌스키 대통령을 백악관 집무실로 불러들여 연 회담에서 그의 군복 차림을 지적하고, “미국에 고마운 줄 알라”는 등의 원색적인 발언으로 강하게 면박을 준 이래 양국 관계는 가장 심각한 위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FT는 진단했다.
당시 충돌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군사 원조를 전면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등 강경히 대응하자 유럽 주요 정상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방의 대오에서 이탈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전방위적 설득전을 벌이며 가까스로 파국을 막은 바 있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재정 지원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무기만 공급하고 있지만, 미국의 정보와 무기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역량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칫 우크라이나와 미국의 안보 협력 관계가 중단된다면 유럽으로서는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과 러시아 간 ‘경유딜’을 놓고 대립한 이후 그간 미국이 제공해오던 러시아 탄도미사일에 대한 조기경보가 갑자기 중단되고 우크라이나군의 ‘생명줄’인 미국의 위성통신 서비스 스타링크에도 예기치 않게 속도제한이 걸리면서 유럽의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미할 마틴 아일랜드 총리는 EU 정상회의 첫날 기자들에게 “우리는 미국과 협력을 이어가야 한다”면서 “예전에도 이 문제와 관련해 여러 도전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상황을 개선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그런 노력이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저녁 브뤼셀에 도착,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바르트 더 베버르 벨기에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와 차례로 양자 회담을 했다.
이는 미국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유럽으로부터 좀 더 적극적인 군사적, 재정적 원조를 끌어내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투스크 총리는 회담에 앞서 “친애하는 우크라이나 친구들, 그리고 젤렌스키 대통령님!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올려 러시아의 거센 공세와 미국의 압박 등 전방위적 어려움에 처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mokiya@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