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전쟁’ 박본 연출가, 배우 트리파티
16~17일 양일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양극화와 알고리즘이 키운 ‘공통의 두려움’
챗GPT로 만든 오페라곡, 행복한 순간 노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모든 게 좋아. 그런데 미래는 훨씬 더 좋아.”
무기를 만드는 대장장이가 노래하듯 읊조린다. 그가 발을 디딘 나라는 어둡고 남루하며 악취를 풍길 것만 같다. 세상은 그들을 ‘몬스터(괴물)’라 부른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 온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행복을 누린다. 오페라극 ‘세 번째 전쟁’에서 대장장이를 연기하는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38)는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꼽았다.
정작 대사를 쓴 연출가는 반대편에 서 있다. 2023년 독일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안나 제거스상을 수상하며 유럽 공연계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국계 독일인 작가 겸 연출가 박본(39)이다.
“제가 자란 독일에서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밝은 미래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현재는 끔찍하고, 미래는 더 나쁠 거라고 생각하죠.” (박본)
한 무대를 만든 두 사람이 바라보는 ‘미래의 풍경’은 이토록 엇갈렸다. ‘세 번째 전쟁’은 그 간극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직조한다. 누군가는 희망을 보고, 누군가는 절망을 응시한다. 다가올 미래가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알 수 없다. 이 오페라극이 오는 16~17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오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과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가 함께 만든 작품이다. 2년간 리서치를 거쳐 지난 5월 광주 ACC에서 초연한 대작이다. 박본 연출가와 오랜 호흡을 맞춰온 작곡가 벤 뢰슬러, 세계적인 소프라노 임선혜와 관록의 배우 강애심 등이 의기투합했다.
공연을 앞두고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박본 연출가와 트리파티는“우리를 묶는 것은 두려움이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공감과 이해”라고 했다.
두려움이라는 공통어…침묵하는 공포 호명
작품은 전쟁을 다루지만, 전쟁의 살육을 재현하지 않는다. 잔혹한 총성도, 낭자한 핏자국도 없다. 마법과 과학이 위태롭게 공존하는 가상 세계 속 세 나라가 오해와 불안을 매개로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심리적 파국’을 따라간다.
박본 연출가가 전쟁이라는 화두를 꺼낸 데엔 이유가 있다. 그는 지금의 세상을 “모든 것이 양극화된 세계”로 봤다. 현실에선 서로 다른 의견이 사람 간의 관계를 가르니 분열의 연속이고, 인터넷에선 현실의 대립을 극대화한다. 내게 딱 맞는 알고리즘 안에서만 유영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 즉각적인 도파민을 주는 하이라이트를 선별해 보여줘요. 그런데 그게 귀여운 고양이만은 아니에요. 전쟁, 폭탄, 죽어가는 아이들, 도널드 트럼프, 기후 위기, 세상의 종말 같은 나쁜 뉴스가 훨씬 많아요. 극우든 극좌든 어떤 의견을 가졌든, 결국 우리를 묶어주는 건 두려움이라고 생각했어요.” (박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선 큰 전쟁이 다시 날 수 있다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박본 연출가는 그 불안이 “모두의 혀끝에 맴돌고 있지만, 누구도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침묵의 공포라고 봤다. 작품의 제목을 ‘3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세 번째 전쟁’으로 지은 것은 관객의 사유가 머물 틈새를 열어두기 위해서다. 그는 “조금 추상적인 허구를 두고 싶었다. 3차 세계대전은 아니지만, 제목을 읽으면 그것을 떠올리기를 바랐다”고 했다.
‘세 번째 전쟁’의 의미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박본 연출가는 “지금도 말씀드릴 수 없다. 언어로 발화해 그것을 존재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트리파티는 “이 작품은 우리가 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전 그것을 공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배우가 바라보는 ‘세 번째 전쟁’은 보다 복잡다단한 층위에 놓인다.
“전쟁은 유럽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도 인도에도 사람의 내면에도 있을 수 있어요. 한국에서 배우로 살고 있는 외국인인 제 안에도 나름의 전쟁이 있을 수 있죠. 작품 안엔 분명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세계의 사람들이 만나 어떻게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고 성장해야 하는지를 다뤄요. 그 이야기들이 무척 와닿았어요.” (아누팜 트리파티)
문명의 시계 위 마법사, 인간, 그리고 ‘괴물’
무대 위엔 세 국가가 ‘문명의 시계’ 아래 정교하게 배치된다. 문명의 정점을 지나 퇴행하는 ‘마법사의 나라’, 문명의 정점에 도달한 ‘인간의 나라’, 정점을 향해 가는 ‘외국인의 나라’다. 박본은 이 구도를 “세상을 관찰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세 나라를 구체적으로 상징하는 현실의 국가가 존재하나, 거기에 판타지 설정을 가미했다.
‘마법사의 나라’는 박본 연출가가 오래도록 동경해 온 ‘꿈의 나라’에서 출발했다. “전 세계가 그 나라의 영화를 보고 배우와 음악가의 이름을 알아요. 모두 그곳에 가고 싶어 하죠. 디즈니처럼 마법 같은 곳이었어요.” 작금의 현실은 다르다. 총기 난사와 마약, 무대포의 정치 지도자가 전 세계 뉴스를 시종 장식한다. 박본 연출가는“지금은 늘 우상으로 삼아 온 마법의 장소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짚었다. 인간의 나라는 한국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모든 것이 있지만, 어째서인지 고달파하고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외국인의 나라’를 만든 것은 시선이다. 박본 연출가는 “유럽에서도 한국에서도 외국인을 내려다보는 고정관념의 시선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 시선을 무대에 그대로 세웠다. 그는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물에서 덜 문명화된 괴물이 나온다. 그들은 대학도 가지 않고, 전용기도 없다. 대장장이, 사냥꾼, 전사 같은 인물”이라며 “외국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판타지로 추상화했다”고 말했다.
외국인의 나라는 실제 외국인 배우들이 국민이 됐다. 작품에선 모두가 한국어를 쓰지만, ‘외국인의 나라’에선 간간이 새롭게 창조한 언어를 발화한다. 거친 파열음과 마찰음을 의도적으로 배치해 이질감과 위협을 유발하는 가상의 언어다. 그는 “버스에서 외국인 몇 명이 자기들 말로 크게 떠들 때,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괜히 위험하게 느낀다”며 “우리가 두려워하는 언어를 디자인하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트리파티는 가장 마음에 드는 단어로 ‘은마흘레’를 꼽았다. 그의 이름은 ‘크르크르브’다. 연출가는 그러나 이 세계의 속살을 완전히 전복한다. 인도와 베트남을 여행하며 느낀 기운을 이 나라에 담았다.
“미래가 지금보다 밝을 거라고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상상이 심장이 뛰고 숨 쉬는 것, 존재하는 것까지 즐기게 하더라고요.” (박본)
외국인의 나라를 지탱하는 주역은 ‘오징어게임’에서 이주노동자 알리를 연기한 아누팜 트리파티다. 그를 향한 연출가의 첫 번째 요구는 “행복한 가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트리파티는 “무슨 말을 하든 ‘행복함’을 표현하려 하고 있다”며 웃었다. 대장장이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고심한 것은 문명의 밑바닥에서 삶을 지탱하는 자의 육체를 빚어내는 것이었다. 신체극적 움직임을 요하는 작품인 만큼 그는 ‘동물적 몸짓’을 탐구했다.
“대도시의 쥐를 떠올리며 연습했어요. 낮은 곳에서 몸을 웅크려 생존을 도모하다 조금씩 존재를 드러내는 몸짓, 독수리와 같은 맹금의 감각을 고민했어요.” (트리파티)
무기를 만드는 직업을 가진 만큼, 손수 벼려낸 쇠 무기의 하중을 온몸의 근육으로 버티는 과정도 거쳐야 했다. 그는 “세 나라 사람 모두가 노동하고 있다”며 “하지만 과연 사회가 누구를 ‘노동자’라는 범주에 넣는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짚었다.
“500년 뒤엔 롯데타워도 문명의 유적”
인류와 역사는 오랜 시간 흥망성쇠를 반복했고, 권력은 화무십일홍의 명제 아래 있었다. 박본 연출가는 “이 행성에서 서른 몇 해밖에 살지 않았지만, 역사를 보면 시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한 문명이 일어났다가 내려가면 다른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그것도 다시 내려간다”고 했다.
“피라미드의 이집트나 앙코르와트의 캄보디아, 남미는 오늘날 권력 면에선 크게 주목받지 않지만 과거 영화를 증명하는 유적이 있어요. 과거에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는 증거로 남아 있죠. 언젠가는 서울의 롯데월드타워도 한 시대를 증언하는 유적이 될지 몰라요.“
‘세 번째 전쟁’ 역시 역사가 증명했고, 많은 작품이 다룬 디스토피아의 도식과 클리셰를 따른다. 그럼에도 이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연출가의 시선은 디스토피아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유토피아를 향한다.
“휴대전화는 뛰어난 기술이자 탁월한 엔지니어링의 산물이고 인류의 지능을 증명하는 물건이에요. 그런데 그걸 쓰는 방식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어요. 첫눈엔 어둡고 추하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문명의 정점에 도달하기 전의) 세계인데,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해요. 이 행성에서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세계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 감정이 그리웠고,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려면 이 감정이 필요하다고 믿어요.” (박본)
아누팜은 늘 그 감정을 지금 품고 사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배우인 그는 늘 희망을 보고, 희망을 품는다. 그는 “점점 더 많은 작품에 외국인 인물이 등장할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많아지고 있고, 잘하고 있고, 신나게 일하고 있다”며 “모든 시상식에 외국인 배우가 앉아 있는 날을 꿈꾼다”고 했다.
“아직 보지 못한 앞날은 어두울 수도 있죠. 그런데 왜 내가 먼저 빛을 막아버려요? 밝은 쪽을 고를 수도 있잖아요.” (아누팜 트리파티)
‘세 번째 전쟁’에서 가장 행복한 장면은 AI로 만든 노래로 채워진다. 등장인물들은 그 행복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박본 연출가는 챗GPT로 이 곡을 만들었다. “AI가 오페라곡까지 만들 수 있는지 보고 싶었다”고 했다. AI 작곡을 하게된 것은 AI가 만든 숱한 영상을 보면서였다. 그는 “AI가 만든 영상이나 이미지 속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웃고 있고 행복해 보인다”며 “‘너무 행복하다’는 것 자체가 연극에 아주 좋은 영감이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행복해 보일 경우 우린 더 이상 그걸 믿지 않는다”고 했다.
앞서 광주 초연은 연출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유럽 관객의 정서에 더 맞을 거라 생각했으나,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혼자 마주한 슬픔이 아니라, 한 공간에서 함께 슬픔을 공유했다”며 “수백 명이 같은 순간 같은 감정을 느끼고, 말없이 서로를 이해했다. 그게 극장이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라고 했다.
“만약 우리 시대의 공통된 감정이 기쁨이었다면 아주 즐거운 연극을 만들었을 거예요. 제가 두려움을 고른 게 아니에요. 두려움이 우리 사이에 있었던 거죠. 사람들 마음에 두려움을 심고 싶은 게 아니라, 모두가 이해받는다고 느끼고 함께 털어내기를 바랍니다.” (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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