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지젤’ 데뷔조 이하연·김윤
김주원 취임 첫 서울 전막…신인 6명 발탁
이하연 14·17일 저녁, 김윤 17일 낮 무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젤’의 막이 오르기 두 달 전, 국립발레단 연습실 게시판에 리허설 명단이 붙었다. 이하연은 제 이름을 보고도 믿지 못했다. 급기야 발레단 동료들에게 “내 이름이 맞는지 확인 좀 해달라”고까지 했다.
“내 귀가 고장 난 거겠지, 내 눈이 잘못된 거겠지 싶었어요. 나중엔 망상이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이하연)
만 17세에 국립발레단 역대 최연소 정단원으로 입단한 김윤에게도 소식은 예고 없이 찾아들었다. 입단 2년 반 만의 첫 주역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주인공을 하게 돼서 처음에는 잘 안 믿겼다”며 “리허설을 계속하다 보니까 되게 재밌고 감사하다”고 했다. “요즘엔 발레단 출근하는 게 재밌어졌어요.” (김윤)
가을이 찾아온 국립발레단 연습실은 새바람이 일고 있다. 김주원 단장 겸 예술감독이 지난 8월 취임 후 선보이는 첫 전막 발레. 7번의 공연에서 6명의 새 얼굴이 주역으로 등판한다. 이은서·엄나윤·이하연·안수연은 지젤로, 나대한·김윤은 알브레히트로 낙점됐다. 파트너 조합이 기막히다. 신예와 베테랑이 호흡을 맞춘다. 이하연(31)은 지난해 박세은의 파트너였던 김기완과, 김윤(19)은 수석 박슬기와 호흡을 맞춘다.
연습이 한창인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두 사람은 “꿈을 이뤘는데 지금도 현실감이 없다”고 수줍게 말했다.
지젤 장인 이하연
이하연에게 지젤은 ‘오랜 꿈’이었다. 올해로 입단 9년 차. 고등학교 시절 입시와 콩쿠르에서 1막 바리에이션을, 대학 시절엔 2막을 췄다. 입단 후엔 시골 처녀, 윌리, ‘지젤 엄마’ 베르트는 물론 미르타의 옷까지 입었다. 지젤 곁의 거의 모든 자리를 거친 명실상부 ‘지젤 전문가’다.
누구보다 다양한 지젤을 곁에서 봤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지젤을 읽었다. 그래서인지 이하연의 지젤은 다층적 시선이 만들어낸 입체적 캐릭터다. 그는 첩보작전을 짜듯 치밀하게, 세공하듯 정교하게 작품을 준비한다. 이하연은 “관객에게 다 전달될 수 없을지라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많이 고민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마음속에 오래 품은 ‘지젤’ 무대의 한가운데 서며 책임감도 커졌다. ‘백색 발레’의 극치를 상징하는 2막의 윌리신은 발레단의 군무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다. 24명의 발레리나가 몇십 분 동안 호흡조차 멈춘 듯 흔들림 없이 지탱하는 시간은 고욕이다. 이하연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는 그 시간이 무척 힘들었다”며 “24명이 공들여 서 주는 만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하연이 꼽은 명장면은 1막의 ‘매드신’이다. 이하연은 “지젤이 충격을 받아 미쳐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알브레히트와 행복했던 때를 회상한다“며 ”눈앞에 꽃밭이 드리운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슬픔도 담겨 있지만, 지젤의 사랑스러움이 흘러나오는 장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하연은 이 장면이야말로 ‘지젤’의 작품성을 응축한 장면이라고 말한다.
이하연의 알브레히트는 수석 김기완이다. 이번 시즌의 베테랑들은 ‘데뷔조’를 책임지고 재능과 잠재력을 깨워주는 역할을 맡았다. 이하연은 “많은 파트너와 지젤을 한 선배라 다양한 제안을 해준다”며 “내가 중심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몸인데 다 잡아 줘서 진짜 믿고 한다”고 했다.
무대 위 이하연의 지젤은 ‘극복 서사’의 증명이다. 어릴 적부터 클래식 발레를 해왔지만, 주변에선 그에게 “클래식 대신 컨템포러리 발레를 해라”고 권했다. 이하연 자신도 “신체 조건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휜 다리는 ‘조각 같은 신체’가 압도적 가산점이 되는 ‘발레의 세계’에선 핸디캡이라 여겨졌던 탓이다.
그는 “발은 토슈즈를 신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고관절이 유연하지 않아 턴아웃(다리를 바깥으로 여는 각도)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어려운 순간도 많았고, 진로를 바꾸라는 제안도 끝이 없었지만 그는 “발레를 그만두는 방법이라는 걸 몰랐다”고 돌아본다. 그에겐 발레가 “가장 재밌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남들과 저를 비교하면 끝도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연습실 계단을 올라오며 마음을 다잡아요.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오직 나에 집중하자, 내 거 하자고요.” (이하연)
국립발레단의 입단 자체가 그에겐 운명처럼 다가왔다. 대학 졸업하고 1~4월까지, 약 70일 동안 홀로 유럽에 머물며 컨템포러리 발레단의 오디션마다 찾아다녔다. 합격한 곳도 있었지만, 원하는 곳에서의 기쁜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때 그는 ‘이곳에서 혼자, 즐겁게 발레를 할 수 있을까,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을 선택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이하연은 오랜 고민 끝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귀국 다음 날 국립발레단 연수단원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들었고, 2018년 4월 입단했다. 심지어 지금은 어릴 적 롤모델이었던 김주원 감독의 지도까지 받으며 지젤로 서게 됐다. 그래서 이하연은 그때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대로 해라. 실패의 쓴맛 한 번 봐야지.” (이하연)
한숨과 함께 자라는 ‘역대 최연소 왕자’
김윤은 기존의 ‘발레 엘리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예술 중, 고등학교에 다니지 않고 일반계 학교에 다니며 발레 학원에서 실력을 키웠다. 4살 위 누나가 바로 국립발레단의 주역으로 최근 빈 국립발레단으로 옮긴 김별이다.
김윤은 “그땐 어려서 그렇게 힘들게 발레하고 싶지 않았다. 학원에서 해도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돌아본다. 그는 올해 코리아국제발레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다.
입단 초기 발레단에서의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철저한 피라미드 등급제인 발레단에서 그는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눈치를 많이 봤다”며 “발레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인지 자연스레 해결됐다.
발레단 입단 1년 6개월 만에 오르게 된 첫 주역 자리이다 보니 여러모로 다양한 수사가 붙는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도 높다. 190cm의 큰 키, 아이돌 멤버 같은 출중한 외모는 새로운 ‘발레돌’의 서막이 열린다는 평도 있다. 그만큼 ‘첫 주역’, ‘최연소 알브레히트’라는 부담이 어깨를 짓누른다. “군무만 하다 갑자기 주인공을 하려니까 책임감이 생기고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요즘 한숨도 깊어졌다.
“한 3일 전부터 한숨이 계속 나왔어요. 제가 남들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성격이라, 그것 때문에 집중이 잘 안되는 게 많이 힘들어요.”
김윤은 힘들 때마다 선배들과 김주원 단장을 찾아가 고민을 토로한다. 그는 “단장님한테 힘들다고 말했는데, 그때마다 자기를 믿고 해 달라고 하셨다”며 “그 말 덕분에 든든했다”고 돌아본다. 김 단장의 신뢰가 김윤의 껍질을 깨트리는 열쇠였다. 늘어가는 한숨만큼이나 19살 왕자의 성장은 빠르다.
‘지젤’ 속 알브레히트는 사실 ‘순수’의 탈을 쓴 나쁜 남자다. 약혼녀를 두고 순진한 시골 처녀에게 다가가는 귀족 청년. 김윤은 “공감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이해는 된다”며 가장 알브레히트다운 장면으로는 2막 바리에이션을 꼽았다. “미안해하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면 같아요.”
등장부터 관객을 사로잡을 만큼 ‘멋짐’을 뽐내는 역할인 만큼 19살 알브레히트의 목표도 “멋있어지고 싶어서 멋을 좀 내려고 한다”며 “거울로 봤을 때 최대한 멋있는 선을 만들려고 하는데 감정 연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윤의 이야기를 듣던 이하연이 말을 보탰다. 서른한 살에 지젤을 하게 된 이하연은 “지금 지젤을 표현하면서 제일 힘든 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지젤 나이였던 때를 떠올리려 콩쿠르 영상까지 찾아봤는데 따라갈 수가 없었다”며 웃었다. 지젤의 나이가 열아홉쯤, 작품 속 알브레히트 역시 비슷한 나이였을 거라고 이하연은 추정했다.
“윤이는 이미 그 나이잖아요. 새로운 마을에 놀러 와 한눈에 반한 사람을 만나는 설렘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청년이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아요.” (이하연)
김윤의 지젤은 박슬기(40)다. ‘최고령 지젤’ 박슬기가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2007년은 김윤이 태어난 해다. 김윤은 “파트너링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누나가 다 커버해 주고 많이 알려 준다“며 ”편하고 마음 좋게 대해주셔서 실력이 많이 늘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서로의 거울이 된 데뷔조
두 사람은 데뷔보다 더 마음 졸인다는 ‘데뷔조’로 세상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공연이 임박한 지난 몇 날 며칠은 부담과 긴장의 쓰나미로 어깨가 더 무겁다.
이하연은 “사실 캐스팅 발표 이후 주역을 맡은 단원들까지 퇴근 시간이 지나도록 연습실에 남아 순서를 외웠다”며 “파트너를 가리지 않고 연습하다 보니 (김)윤이와 호흡을 자주 맞췄다”고 했다. 두 사람이 그때 했던 약속이 하나 있다.
“데뷔조니까 같이 열심히 하자, 좋은 말만 해주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적도 하고, 약이 되는 쓴소리를 해주자고 약속하며 서로를 의지했어요.” (이하연)
쓴소리는 주로 선배 이하연의 몫이었다. 그는 칭찬 앞에서도 엄격했다. 이하연은 “원래 칭찬받아도 3분의 1만 받아들이는 보수적인 스타일”이라며 “윤이한테 단장님이 칭찬을 해도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했다”며 웃었다.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정신 차려, 힘내”라며 서로를 북돋웠다. 김윤 역시 “누나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데뷔조’ 중에서도 막내인 김윤은 지금 모든 걸 흡수하는 시기다. 그의 눈에 비친 이하연은 뭐든 “다 따라 하고 싶은 선배”다. 그는 “처음 봤을 때부터 연기를 너무 잘하고 능숙해 감탄했다”며 “그렇게 잘하는 데도 남아서 연습을 하니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하연은 김윤의 타고난 재능과 노력을 높이 샀다. 그는 “윤이는 안정적인 기본기와 테크닉을 바탕으로 매번 정확한 포지션이 나온다”며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본인이 계속 생각하는 게 보여 나도 저렇게 신경 써야겠다고 상기하게 된다”고 했다. 이젠 쉼 없이 달려온 지난 두 달의 여정을 증명할 시간이다.
‘지젤’은 이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발레 여정의 첫 관문이자, 또 한 번의 변곡점이다. 이하연은 “다시 군무로 돌아가도 무대에 서는 마음이 달라질 것 같진 않다”며 “어떤 역할을 맡든 초심은 잃지 않되 반경을 넓히는 춤을 추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이 그리는 무용수는 기교 그 너머에 있다. “감동이라는 표현은 너무 1차원적인 것 같아요. 진짜 진심을 느끼게 하는 무용수가 되고 싶어요.” (이하연) “남들 눈치 안 보고 집중해서 할 수 있는 무용수가 되고 싶어요.” (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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