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웬만한 무대 이미지 잘 만들어

세상 보는 눈·상상력 있는 인간이 완성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프로젝트는 두 개예요. 하나는 온전히 내 머리로 쓰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AI) 툴을 최대한 활용해 완성해 오세요.”

예순넷의 ‘무대 거장’이 대학 강의실에서 던진 과제에 학생들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제도판 위에 연필과 삼각자로 손 도면을 꾹꾹 눌러 그리던 1980년대 청년을 지나, 모니터 앞에서 생성형 인공지능(AI)과 머리를 맞대고 신작의 빛을 렌더링하는 시노그래퍼(무대 미술가) 박동우의 유쾌한 실험실 풍경이다.

그가 걸어온 40년의 작업 환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삼각자에서 3D 프린터로, 페인트 물감에서 영상의 빛으로 진화해 온 한국 무대 기술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인터넷으로 모든 자료를 찾고, 모형은 3D프린터와 커팅 기계로 깎는다.

박동우는 “예전엔 디자이너가 100을 생각해도 무대엔 60짜리가 올랐다면 지금은 100을 생각한 무대가 그대로 세워지고, 제작소에선 디자이너가 미처 몰랐던 재료까지 보태 120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가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기증한 ‘명성황후’, ‘영웅’, ‘신과 함께’ 모형은 모두 AI가 없던 시절에 만들었다.

요즘 그는 AI를 많이 쓴다. 국립극단 연극 ‘역행기’의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줄기의 질감을 잡을 때 AI를 조수로 활용했다. “혼자 끙끙대며 붙잡고 있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내가 그리는 것보다 잘 그려요. (웃음)” 그는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을 보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 ‘역행기’ 무대 바닥의 질감을 스케치할 때도 AI의 도움을 받았다. 기술의 고삐를 쥐고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아야 미래 무대의 주인이 된다는 생각이다.

3톤 무대 바닥을 공중으로 들어올린 박동우 무대미술가의 연극 ‘역행기’ [국립극단 제공]
3톤 무대 바닥을 공중으로 들어올린 박동우 무대미술가의 연극 ‘역행기’ [국립극단 제공]

그러나 신기술이 늘 답은 아니다. ‘명성황후’는 25주년 공연에서 LED 패널 영상을 들였다가 30주년 무대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갔다. 영상 시대에 맞춘 제작진의 실험이었지만, 이 작품엔 아날로그 감성이 더 어울린다는 평에 과감히 방향을 바꿨다. 기술을 대하는 원칙도 확실하다. “물감이 빛으로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물감의 대체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의 매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2015년 서울예술단 창작가무극 ‘신과 함께’에서 무대 바닥 전체에 LED를 깔았다. 배경 막을 영상으로 바꾸는 안이한 전환이 아니라 배우들이 딛고 선 바닥 전체에서 불길이 솟구쳐 오르는 불지옥을 구현할 유일한 해법이어서다. 국내 극장 공연에서 무대 바닥에 LED를 쓴 첫 사례였다.

이미 기술이 인간의 손재주를 넘어서는 시대다. 그럼에도 인간 디자이너는 왜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까. 박동우는 망설임 없이 ‘비등점’을 꺼내 들었다.

“물이 끓기 위해선 100도라는 비등점을 통과해야 해요. ‘명성황후’의 이중 경사 회전무대나 ‘역행기’의 3톤 바닥 리프팅 같은 발상은 데이터 조합으로 나오지 않아요. 사람의 머리와 감성 안에서만 일어나는 깊은 예술적 과정이 있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디자인은 AI에 자리를 내줄 거예요.”

시대를 읽는 눈, 작품마다 다른 개별성을 담는 것은 AI만으로 가능해지고 있다. 예술성은 거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강의실에서 두 가지 과제를 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결과물엔 당연히 차이가 크다. 그럼에도 두 길을 모두 따라가 보게 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두 방법을 모두 잘 다뤄야 둘을 합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무대 디자이너로 갖춰야 할 자질로 꼽는 것 역시 그림 솜씨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과 상상력”이다.

“인쇄술이 필경사를 대신했듯 직업은 기술과 함께 대체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기술을 엮어 하나의 공간으로 빚는 건 결국 사람이에요. AI를 누가 쓰죠? 인간이 쓰잖아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