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거장’ 박동우 홍익대 교수 인터뷰
회전무대보다 힘든 ‘돗자리 한 장’ 기억
“지금 여기서 왜 하는가?”를 늘 질문해
“시인·화가·건축가처럼 해석하고 만든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육중한 침묵을 뿜어내는 3톤(t)의 무대 바닥을 허공으로 들어 올린 ‘역행기’, 스러져가는 조선의 황혼을 이중 경사 회전무대의 소용돌이로 응축한 ‘명성황후’, 서늘한 자작나무 숲을 뚫고 12m 실물 기차를 내달리게 한 ‘영웅’, 거대한 윤회(輪廻)의 바퀴 아래 타오르는 지옥 불을 깔아놓은 ‘신과 함께’….
40년간 무대 위에 기적 같은 우주를 지어 올린 무대 디자이너 박동우(64·홍익대 교수)는 “대본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무대가 완성될 때도 있지만, 어떤 작품은 정말 많은 고민을 거쳐야 나온다”고 돌아봤다.
그에게 가장 큰 ‘난제’였던 작품은 바로 뮤지컬 ‘명성황후’다. 그토록 많은 세계를 창조했건만, ‘돗자리 한 장’ 앞에선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극 중 명성황후가 훗날 순종이 되는 세자와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그곳에 깔린 돗자리가 문제였다. 라이브 무대에선 배우와 스태프가 소품을 치우는 일도, ‘장면 전환’ 시간을 벌기 위해 조명을 끄는 일도 흔하지만, 그에겐 두 가지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한 장의 돗자리를 치워야 하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이 무대에선 더 어렵더라고요. 거대한 회전 무대를 잘 돌아가게 하는 것보다도요.”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가장 안 풀린 장면’으로 ‘돗자리’ 방을 꼽는다. ‘명성황후’에 단 한 번 암전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끔찍이도 꺼리는 장치다. 그는 “영화에서 화면이 바뀔 때마다 10~30초씩 까만 화면이 이어진다면 어떤 관객이 받아들이겠나”며 “관객에게 사유의 틈을 주려는 연출도 아닌데 암전이 되풀이되면 그건 만든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장면의 정서를 지키기 위해 소품 하나를 치우는 방식까지 고민하는 ‘디테일의 장인’이다.
최근 서울 서초동 작업실에서 만난 박동우는 “무대는 멈춰진 세트가 아니라, 배우와 관객의 호흡이 부딪혀 타오르는 생명체”라고 했다.
같은 ‘햄릿’이어도 무대는 달라진다
그의 무대는 하나의 세계다. 1987년 극단 산울림 ‘숲속의 방’으로 데뷔해 40년간 400여편의 세계를 창조했다. 수많은 공간을 설계해 온 그에게 무대는 단순히 대본 뒤에 세워진 배경이 아니다. 관객과 시대가 만나 불꽃을 일으키는 ‘은유의 장’이다. 때론 혹독한 역사를 관통하고, 때론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며, 때론 소박한 삶을 직조하지만, 그가 공간을 세우는 ‘출발점’은 늘 같다. 바로 ‘대본’이다.
박동우는 “작품의 핵심 주제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디자인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작품마다 추구하는 미학은 다르다. 그는 “어떤 경우엔 사실적인 무대가 더 잘 전달되고, 어떤 경우엔 상징적으로 말해야 깊이 가닿는 작품도 있다”는 설명이다. 전자가 연극 ‘산불’이라면, 후자는 뮤지컬 ‘명성황후’다. 선택은 달라도 화두는 하나다.
“우리는 왜 지금, 여기서 이 공연을 올려야 하는가.”
박동우는 “400년 전 셰익스피어든, 2500년 전 그리스 비극이든 오늘의 관객과 만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햄릿’을 언제 올리느냐에 따라 무대가 달라지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가 선보인 두 편의 ‘햄릿’은 텍스트는 같았지만, 시대와 호흡하는 시선에 따라 완전히 다른 유기체로 태어났다.
2016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 위에 객석 600석을 올린 것은 지금도 파격으로 회자된다. 그는 “무대 위에서 연극을 보던 관객들이 마지막 장면 이후 텅 빈 객석을 지나 극장을 나서게 했다”고 회고했다.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린 이 무대는 “이 세상은 무대요, 인간은 모두 배우”라는 연극적 본질을 공간으로 증명했다.
반면 2022년의 ‘햄릿’ 무대는 거울처럼 매끈한 바닥, 하늘을 찌를 듯한 철벽으로 ‘찬탈자 클로디어스’의 막강한 권력을 보여줬다. 그 뒤로는 검은 흙의 공동묘지를 뒀다. 부당한 권력 앞에 선 청년 햄릿의 무력한 고독, 죽음 앞의 평등을 상징하는 장치였다. 그는 “늘 공부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며 “시대성을 읽지 못하면 예술가들은 쇠퇴한다”고 경계했다.
망막 대신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리다
지난 1995년 데뷔 8년 차였던 박동우는 이 업계에선 ‘신인’급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한국 뮤지컬계 거목인 윤호진 에이콤 예술감독은 그에게 대작 뮤지컬 ‘명성황후’의 무대를 맡겼다.
이 무대를 위해 그가 붙든 것은 ‘상징’이었다. 박동우에게 무대는 실물을 기계적으로 옮겨놓는 ‘복제 공간’이 아니다. 작품에 따라 ‘사실적 재현’을 택할 때도 그의 눈은 늘 ‘사유의 깊이’에 향한다. 눈앞에 구체성을 그려내면 상상력은 멈추지만, 본질을 응축한 상징을 던질 때 관객은 “머릿속에서 무한한 우주를 확장해 나간다”는 믿음이다. ‘명성황후’에서 경복궁 근정전의 우람한 나무 기둥 대신 붉은 노을이 채색된 발(簾)을 드리운 것이 대표적이다.
“일몰 직전 스러져가는 조선의 황혼이자 일제의 만행에 대한 분노를 담았어요. LED로 진짜 같은 기둥을 띄우면 경복궁 기둥이라는 한 가지 의미밖에 갖지 못해요. 하지만 빛과 어둠 속에 투과되는 붉은 발 기둥을 보며 무너져 내리는 국가의 운명이라는 정서를 완성할 수 있죠.”
무대 바닥에 조선의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새겨 넣고, 이중 경사 회전무대를 결합해 소용돌이치는 구한말의 비극을 그려낸 것, 잦은 어전(御殿) 장면마다 옥좌를 순식간에 높이 올린 것 역시 상징과 기능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는 “무대에선 상징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그 상징이 기능까지 만족시켜 줘야 한다”고 했다.
뮤지컬 ‘영웅’에선 감옥 안 이토 히로부미의 유령으로 시작하던 초기 대본을 과감히 뒤집고, 블라디보스토크 벌판 위 순백의 ‘자작나무 숲’을 전면에 세웠다. 작품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하얼빈과 블라디보스토크 답사에 나섰던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광이 단초가 됐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착륙할 때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이 있었어요. 혹한 속에서도 곧게 뻗은 하얀 나무들을 보며, 저 숲이야말로 독립투사의 기개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장면은 안중근과 동료들의 단지동맹을 숭고하게 물들이는 ‘영웅’의 명장면이 됐다. 박동우는 “관객들의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주는 것, 그것이 정말 상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표 던진 ‘대우맨’…시인·화가·건축가로 40년
무대 위에서 40년을 보냈지만, 사실 그는 먼 길을 돌아 이 자리에 왔다. 경북 청송에서 자라 “책 읽는 것 말고 딱히 할 게 없었다”던 그는 어린 시절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소설가 최인호(1945~2013)가 그의 최애 작가다. 일찌감치 그림도 그리며 건축가로서의 꿈을 품기도 했다. 그에게 건축은 미켈란젤로가 그랬듯 ‘미술의 영역’이었지만, “문과생이 이과를 지원하면 15점이 깎이던 입시제도”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
진로가 바뀐 것은 재수 시절 서울역 앞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을 날마다 지나면서다. 열아홉 살의 그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롤모델로 삼았다. 실제로 그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곧장 대우에 입사했다.
하지만 엘리트 직장인의 일상은 녹록지 않았다. 신입사원에게 창의적인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당시 그는 매일 ‘무엇을 해야 하나’ 늘 고민했다. 가슴 한구석 갈증을 견디지 못한 즈음, 대학 연극반에서 20편 가까이 무대 미술을 맡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입사 1년 반 만에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다. 그는 “무대 미술을 하겠다고 하자, 회사 동료들은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이냐’고 묻곤 했다”며 웃는다. 전업 무대 디자이너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직업이 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걸 나의 직업을 만들겠다, 전업 디자이너로 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홍익대 대학원에서 무대 디자인을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이 길을 걷게 된 그는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이해랑연극상을 받는 등 국내 무대 미술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연출도 하고 있지만, 그에게 무대 디자인은 언제나 뿌리다. 그는 무대 디자이너를 “시인이자 화가이자 건축가”라고 정의한다. 시대의 화두를 함축하는 시인처럼, 그 사유를 형상으로 빚는 화가처럼, 밀리미터 단위 도면으로 무대를 세우는 건축가처럼 일한다는 의미다.
이 정밀한 공정의 종착점은 언제나 ‘배우’다. 아무리 압도적인 무대라도 배우를 불편하게 하거나, 등퇴장을 방해한다면 ‘실패한 무대’다. 그는 “무대의 주인은 관객과 살을 맞대는 배우”라며 “좋은 무대는 소극적 배려를 넘어 계단, 경사면 하나로 배우의 에너지와 연기를 끌어내는 살아있는 발판이어야 한다”고 했다.
어느덧 누군가의 롤모델이 됐지만, 지금도 무대 거장에게 타협은 없다. 늘 새로운 도전을 찾고, 무대 위 혁신을 벼린다. 제자들에게도 ‘열정과 실험정신’을 당부한다. ‘늘 하던 대로 하자’는 타성에 젖는 순간 예술은 멈추기 때문이다. 수백편의 무대를 세웠지만, 그는 아직도 “오래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며 40년 전 청년처럼 웃는다.
“직업만 같을 뿐, 단 한 번도 같은 일을 반복한 적이 없어요. 매번 완전히 다른 희곡, 다른 시대의 인간을 만나왔으니, 늘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