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구자혜·트랜스젠더 배우 색자
50년 선 젠더바 내려와 1인극 무대로
15~16일 SPAF 초청 아르코극장 공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열여섯 살 소년이 집을 떠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집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 종로의 파고다극장. 잡지 ‘선데이서울’에서 ‘그곳’에 가면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본 터였다. 탑골공원(옛 파고다공원) 옆 오래된 동시상영관은 그 시절 갈 곳 없던 성소수자들이 ‘서로’를 알아본 몇 안 되는 장소였다.
‘색자’의 삶은 그날의 선택에서 시작됐다. 그 뒤로 50여 년, 그는 젠더바 무대에 섰다. 때론 퀸이었고, 때론 킹이었다. 눈빛과 손짓 하나로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프리마돈나였다. 그 무대에서 내려온 건 올해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그만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슬프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시원섭섭해요.”
무대에 서는 건 ‘체질’이었다. 하지만 무대에 서기 위해 술집에 나가는 건 좋지만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일할 수 있는 데는 그런 곳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호스티스, 기생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70이라는 나이는 화류계에선 사실, 없는 나이죠.”
1957년생 트랜스젠더 색자(69). 그는 자신을 ‘트랜스젠더’ 대신 ‘젠더’라고 부른다. 밤무대는 떠났지만, 그에겐 무대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자기 삶을 들려주는 1인극 ‘뺨을 맞지 않고 사는 게 삶의 전부가 될 순 없더라’(15~1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다. 연출가 구자혜와 함께 쓴 이 작품은 2024년 페미니즘연극제에서 처음 올라 올해로 3년째다. 이번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관객과 만난다. 공연은 이미 전석 매진됐다. 무대에는 해마다 달라지는 색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다.
최근 서울 대학로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만난 구자혜 연출가는 “진짜 사람의 이야기이니 계속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초연, 재연 때는 색자의 미시사(史) 같은 접근이었다면 이번엔 이 한 편의 공연이 아카이빙이 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게 된 젠더 술집에서의 반세기 여정도 이번 무대에 담긴다.
“남자가 화장하고 술 판다고?!”…‘기록돼야만 하는 삶’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건 지난 2021년 ‘드랙×남장신사’에서부터다. 소수자의 이야기에 천착해 온 구자혜 연출가 앞에 나타난 색자는 한 개인이자 집단의 역사였다. 첫 만남이 매끄럽진 않았다. 색자는 “연출가가 나한테만 연습을 안 시켜서 내심 서운했다”며 “술김에 단체 대화방에 ‘내 장면에는 연출가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했다. 이튿날 술김에 남긴 말을 사과하자,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너무 잘해서 연습시킬 게 없었어요.” 색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우리 친구 하자”고 했다며 그날을 떠올렸다.
이 연극도 술자리에서 나왔다. “네 실력이면 훌륭하니, 상업적인 것을 써 보라”고 했더니 구자혜 연출가는 색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내 입장에선 엄청난 상업극”이라며 웃었다. 다만 여기엔 ‘농담’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젊은 퀴어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 하셨고, 무대에서 가시화되는 것으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기록되어야만 하는 삶을 사셨기에 남기고 싶었어요.” (구자혜)
제목은 구자혜 연출가가 퀴어 청소년이 나오는 희곡에 썼던 대사에서 따왔다. 구 연출가는 “과거에 비해 퀴어들이 살기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물리적 체벌이 사라졌다고 해서 삶의 조건이 마련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카카오톡으로 이 제목을 받은 날, 색자는 “펑펑 울었다”. 뺨을 맞지 않는다고, 사는 게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엔 뺨을 맞는 것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1980년대 이태원에서 일하던 그는 ‘풍기문란’으로 즉결심판(가벼운 죄를 곧바로 처벌하는 재판)에 넘겨지곤 했다. ‘머리가 길다’고, ‘치마가 짧다’고 경찰서에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1983년엔 서울 종로경찰서가 게이 업소에서 일하던 ‘여장 남자’들을 즉결심판 법정에 세웠다.
경찰은 업소마다 한 달에 두 번, 두 명씩 스스로 용산경찰서에 들어오게 했다. 어느 해 8월, 색자의 차례가 왔다. 구류 3일 처분을 받은 그와 동료 4명가량은 이른바 ‘닭장차’에 실렸다. 차가 향한 곳은 유치장이 아닌 유원지였다. 경찰들이 물에 발을 담그고 ‘닭을 뜯는’ 동안, 이들은 작은 창 하나 달린 까만 차 안에서 몇 시간을 버텼다. 숨이 막히는 한여름이었다.
“그때 우리가 안 죽은 게 다행이죠. 지금 같으면 그런 인권 유린이 없죠. 무슨 살인죄(인)도 아니고.” 내내 유쾌하던 색자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서러운 눈물을 떨궜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난다”고 했다. 이 장면은 무대 위 대사로도 나온다. 제5공화국 시절의 억압은 젠더에게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단속도 다 억압이었죠. 그게 억압의 세월이었어요.”
파고다극장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돈암동 여관방, 이태원을 거쳐 바다 건너 일본으로도 향한다. 그는 “(지금도) 잊어버리지도 않는” 1984년 12월 24일, 연예인 비자로 처음 일본에 건너간 그날을 무대에서 더듬는다. 해외여행이 모두에게 열리기 5년 전의 일이다. 1993~2002년 무렵까지 그는 히메지 무대에 섰다.
구자혜 연출가는 계엄과 통금(밤 12시~새벽 4시 통행금지)이 있던 시대가 색자의 삶과 겹치며 다른 층위를 갖게 됐다고 짚었다. 그는 “나한테 그 시기는 통으로 ‘폭력의 시대’로 기억되는데, 색자님과의 대화를 통해 폭력과 고통이 덩어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소수자의 소수자가 겪는 폭력은 또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렇기에 이 공연은 아카이빙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색자의 삶을 드러내면서 아카이빙이 따라오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역사와 색자의 삶을 얼마나 겹쳐놓고, 어디까지 넣을지는 아직 고심 중이다. 구 연출가는 “색자님의 삶에 한국의 역사가 연동되는데, 두 개가 같이 가야 삶이 더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며 “그러려면 설명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연출가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색자의 답은 간단하다. “고민할 게 뭐 있어요. 그냥 넣으면 되지.”
“남자로 태어났지만 젠더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는 일찍부터 자신을 알았다. ‘왜 남자의 몸인데 남자를 좋아할까’ 하는 또래의 고민도 그에겐 없었다. 그러니 자신을 숨길 이유도 없었다. 손가락질을 받을수록 그는 더 고개를 들었다.
“죄지은 게 없으니까요. 다른 삶일 뿐이지, 누굴 죽였거나 남의 걸 훔쳤거나 그런 짓은 안 했으니까요.” (색자) 1980년대엔 일본말 ‘오카마’로 불렸고, 1990년대 들어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생겼다. 그때부터 그는 ‘트랜스’를 떼고 스스로를 ‘젠더’라고 불렀다. “그걸 흉이라고 생각 안 했어요. 나 같은 사람도 있지 싶었죠.” (색자)
1986년, 20대 후반의 색자는 한 여관방에서 죽음과 맞바꾸는 ‘절실한’ 마음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았다. 5시간, 당시 돈 200만원이 든 수술은 전신마취도 아닌 부분마취로 진행됐다. 그럼에도 그는 지금까지 주민등록증의 성별을 바꾸지 않았다. 법원이 성별 정정을 인정한 건 2006년 대법원 결정부터다. 하지만 성별을 정정하려면 의료 기록으로 몸이 바뀌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것이 현실. 병원이 아닌 여관방에서 수술받은 그에겐 자신의 성을 증명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색자는 “설령 바꾼다 해도 본연의 성별은 바뀌지 않는다. 수술은 했지만 나는 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남자로 태어났지만, 그냥 젠더인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성별은 처음부터 삶을 가르는 기준이 아니었다. “남자냐 여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사람으로 사는 거죠.” (색자)
사회적 참사와 소외된 죽음을 실험적인 방식으로 다뤄 온 구자혜는 색자를 만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무대를 채웠다. 구 연출가는 “내 연출의 틀에 색자를 끼워 넣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룰 때마다 그는 ‘대상화’와 ‘타자화’를 늘 경계한다.
구 연출가는 “예술이라는 이유로, 연출이라는 이유로 타인의 삶을 무대에 올리는 순간 대상화는 작동되는 것 같다”며 “그런데 색자님이 도리어 자기 자신을 기꺼이 대상화하는 힘으로 무대를 끌고 간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구 연출가는 “제가 겪은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너무 조심하는 게 오히려 색자님을 타자화하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무대 위의 철칙은 색자의 판단에서 나온다. 그는 자기 이야기는 뭐든 풀어놓지만, 연극적 재미를 위해 친구와 동료의 이야기를 장면으로 만들지 않는다. 혹여 그럴 만한 장면이 나오면 “어떤 것들은 내 친구들 얘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친구들의 고통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라며 구 연출가에게 당부한다고 한다.
세상 밖으로 나온 색자의 삶은 총천연색이었다. 드러나지 않아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1세대 트랜스젠더의 여정이 그를 통해 드러난다. 정작 그는 ‘1세대 트랜스젠더’란 타이틀에 선을 긋는다. 자신보다 먼저 길을 낸 선배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몰라서 1세대지, (전) 사실 1세대 아니에요.”
다만 이 무대로 색자라는 이름이 그 세대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것은 사실이다. 구 연출가는 “연극은 시간과 돈을 들여 그 시간에만 주어지는 거니까 더더욱 대표성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면서도 “그런데 여전히 음지화된 친구들도 있다”고 짚었다.
색자가 무대에 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평생을 프리마돈나로 살아온 그는 2016년엔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 트랜스젠더 바텐더로 출연했고, 2021년 연극 데뷔 이후 지난 1월엔 제62회 동아연극상 특별상도 받았다. 그는 “젠더가 되기 전에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많더라”며 “우린 누가 시켜서, 누가 밀어서 (트랜스)젠더가 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우린 타고나는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선택받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우린 죄인이 아니에요. 나가서 할 일이 많아요. 이렇게 태어난 것부터가 재주니까, 음지에 있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나오세요.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용기를 내세요.” (색자)
색자의 무대는 멈추지 않는다. 공연을 마치면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오랜 시간을 돌아봐도 그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열여섯 살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다. “그때는 용감했다. 겁도 없이. 학교 다니다 빡빡머리로 나와서,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잖아. 색자야, 너는 훌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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