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만에 최저점 찍은 엔화 환율
여행객들 “나중에 가더라도 환전”
체류비 부담 줄자 일본 예약 급증
항공료 인상 상쇄한 환율 하락 효과
한국인 방일객 1000만명 돌파 확실
[헤럴드경제=김명상 기자] “10년 만에 보는 역대 최저 엔저다. 900원에 싸다고 샀다가 더 내려가 물타기를 하고 있다.”
최근 100엔당 800원대 중반까지 떨어진 원·엔 환율이 일본행 여행 심리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엔화가 쌀 때 미리 쟁여두겠다”는 여행객들의 ‘선환전’ 수요가 몰리면서, SNS(누리소통망) 등 온라인 상에는 환전 사례를 공유하고 여행 일정을 계획하는 게시글이 잇따르는 모습이다.
현재 원·엔 환율은 역대급 저점 구간에 머물고 있다. 서울외환시장 기준 원·엔 재정환율은 지난 10월 7일 장중 100엔당 842.19원까지 떨어졌다. 이는 2008년 1월 2일(833.40원) 이후 약 18년 9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다.
이는 일시적 급락이 아닌 수개월째 이어진 추세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ECOS) 자료에 따르면 100엔당 월평균 원·엔 환율은 지난 6월 950원대에서 7월 920원대, 8월 880원대, 9월 860원대로 뚜렷한 내림세를 이어왔다. 10월에는 평균 환율이 850원 선까지 내려앉으며 6월 대비 10% 넘게 급락한 상태다. 시장 일각에서는 100엔당 800원대 초반 진입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환율이 내리면서 여행객의 비용 부담도 눈에 띄게 줄었다. 지난 6월 평균 환율 기준 10만 엔 환전에 약 95만 원이 들었지만, 지금은 약 85만 원 선이다. 불과 넉 달 만에 10만 원 가까운 비용 절감 효과를 보게 된 셈이다.
지갑 열린 여행객…일본 여행 예약 ↑
비용 부담이 낮아지자 여행사의 일본 예약도 일제히 늘었다. 주요 여행사들은 가을 단풍과 겨울 온천 등 계절적 성수기와 엔저가 맞물리며 가파른 예약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교원투어의 4분기 일본 상품 예약률은 전년 동기 대비 161% 늘었다. 모두투어는 3분기 일본 여행 송객 인원이 전년 동기 대비 31.7% 늘었고, 10월 예약도 34.2% 증가했다고 밝혔다. 참좋은여행은 9월 이후 현재까지 일본 예약자가 전년 동기 대비 34% 증가했다고 집계했다. 업체별로 전년 실적에 따라 증가율은 다르지만, 전 여행사에서 고른 상승세가 나타나는 모습이다.
여행업계는 이 같은 호조의 배경으로 ‘엔화 약세’와 ‘소도시 노선 확대’를 꼽았다. 주요 대도시뿐 아니라 지방 소도시까지 하늘길이 넓어진 데다, 현지 체류 경비 절감 효과까지 더해진 영향이다.
김동일 교원투어 매니저는 “항공 노선 확대 영향도 있지만, 지난해와 비교해 엔화 약세가 두드러지면서 현지 체류 비용 부담이 줄어든 점이 수요를 끌어올렸다”고 설명했다.
국제유가 반등으로 항공권 유류할증료가 오른 것도 엔저 효과가 상쇄하고 있다. 10월 국제선 유류할증료 산정 기준인 싱가포르 항공유(MOPS) 가격은 배럴당 158.57달러로 전월 대비 약 6.2% 상승했다. 이에 따라 국제선 유류할증료 적용 단계는 지난 8월 14단계에서 9월 21단계, 10월 23단계로 두 달 연속 올랐다. 다만 항공료 상승분 대비 현지 숙박·식음 등 체재비 부담이 줄어들면서 여행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인 양상이다.
이상필 참좋은여행 부장은 “항공료가 오르면서 일본 패키지 상품가가 10~20% 인상됐지만 예약 증가세가 꺾이지 않는 것은 엔화 약세 때문”이라며 “엔저가 확실히 일본 여행 심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동남아 줄고 일본 급증…판도 뒤흔든 ‘엔저’
일본 노선의 독주는 인근 동남아 노선의 흐름과 대비된다. 국토교통부 항공정보포털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9월 일본 노선 여객은 2395만 명으로 전년 대비 20.5% 늘었다. 반면 동남아 국가 중 베트남은 733만 명(-5.4%), 태국 255만 명(-14%), 필리핀 272만 명(-14%), 말레이시아 79만 명(-16.8%)으로 감소세가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업계에선 일본 수요 강세가 타 근거리 지역의 여행 수요를 ‘흡수·잠식하고 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김동일 교원투어 매니저는 “동남아는 유류할증료 인상과 현지 물가 상승으로 수요가 둔화해 일본이 동남아 수요 일부를 흡수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목적지별 특성이 달라 직접적인 잠식보다는 ‘신규 수요 창출’에 가깝다는 시각도 있다. 이윤우 모두투어 매니저는 “중국은 관광 콘텐츠, 동남아는 휴양 중심 수요, 일본은 엔저와 소도시 항공 공급 확대라는 요인이 달라 각기 다른 수요층이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공통적으로 업계는 엔저 기조가 이어지는 한 일본 여행의 호조세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도쿄·오사카 등 기존 인기 지역 외에 고베·히로시마·아오모리·하코다테 등으로 좌석 공급이 늘어, 4분기는 물론 내년까지 수요가 견조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박은정 하나투어 선임은 “항공사들의 소도시 노선 확대와 엔화 약세가 맞물려 수요를 견인했으며, 가을 단풍과 겨울 온천 등 계절적 성수기 수요가 집중되는 하반기에도 호조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짚었다.
日 “올해 한국인 여행객 1000만 넘을 것”
업계가 꼽는 변수는 자연재해와 한일 외교 관계 등 돌발 상황이다. 이상필 참좋은여행 부장은 “12월부터 2월까지 겨울 성수기에 일본 여행이 최고 호황을 맞을 것”이라며 “지진이나 한일 관계 같은 돌발 변수가 없다면 이 추세가 2027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단기적으로는 엔저 국면이 유지되면서 올해 방일 한국인 규모는 역대 최대치를 경신할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정부관광국 서울사무소 관계자는 “한국인 방문객은 지난해 945만 명 수준이었으나 올해 8월까지 누계로 전년 대비 21% 증가한 742만 명을 기록했다”면서 “올해 1000만 명 돌파는 확실시되며 하반기 통합 집계 시 1100만 명 도달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역대급 엔저가 수요를 견인하는 현 구조는 향후 환율 변동 시 ‘양날의 검’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엔화 가치가 상승세로 돌아설 경우 가격 경쟁력을 갖춘 대체 관광지로 수요가 빠르게 분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관광공사가 발간한 ‘엔화 약세가 방일시장과 소비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환율 변동에 따른 일본 여행 결정 영향도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5.5%는 ‘엔화 강세 시 일본 여행을 망설일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보고서는 “일본과 가까운 국가 한국, 대만 등의 시장에서는 엔화 약세가 일본 여행 유인 요인 중 하나”라며 “엔화 강세 국면으로 들어갈 경우 동남아시아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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