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박수를 더 치면 이 상을 트럼프와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나비 필라이(85) 국제사법재판소(ICJ) 임시 재판관이 이렇게 농담을 건넸다.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 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꼬집은 말이다.
AFP통신과 미국 CBS방송 등 외신에 따르면 필라이 재판관은 9일(현지시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소된 나치 지도부의 재판이 열렸던 독일 뉘른베르크 법원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상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내가 이 역사적인 법정에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그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호명됐을 당시 뉘른베르크포럼 행사 참석차 독일을 방문 중이었다.
수상 소식을 들었을 당시 그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며, 법률가로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고도 털어놨다. 아녜스 칼라마르 국제앰네스티(AI) 사무총장이 엑스(X·트위터)에 올린 약 3분짜리 영상을 보면 필라이 재판관은 수상 소식을 접하고 동료들에게 수상을 축하받았다.
그가 이 소식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데엔 배경이 있다. 지난해 수상자인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올해 초 자신의 노벨평화상 메달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건넸다. 노벨위원회는 메달은 건넬 수 있어도 수상 자격은 남에게 넘길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필라이 재판관은 “이 상을 국제범죄의 모든 생존자에게 바친다”며 “우리는 국제법과 인권이 정치적 공격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국제형사재판소(ICC)가 공격을 받는 모습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ICC는 전쟁범죄나 집단학살을 저지른 사람을 재판하는 국제 법원이다.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인권을 지키고 전쟁을 삼갈 법적 의무가 있다고 당부했다.
ICC를 가장 거세게 공격해 온 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달 22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ICC를 ‘불량 기관’이라 부르며 모든 회원국에 탈퇴를 촉구했다. ICC가 2024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체포영장을 발부한 뒤 미국은 압박 수위를 높여 왔다. 필라이 재판관은 2003년부터 2008년까지 ICC 재판관으로 일했다.
그는 이스라엘과도 부딪쳐 왔다. 유엔 인권이사회가 만든 독립 조사위원회를 이끌며 지난해 9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저질렀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 위원회는 유엔의 공식 입장을 대신 말하는 기구는 아니다. 이스라엘은 보고서 내용을 전면 부인한다. 필라이 재판관은 이 보고서로 용기 있다는 칭찬을 받아 놀랐다며 “진실을 말하는 데 왜 용기가 필요한가”라고 되물었다.
예르겐 와트네 프뤼드네스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수상이 국제 체제와 기구를 흔드는 이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다만 위원회는 수상 이유를 밝히면서 가자지구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곧바로 반발했다. 외무부는 이번 수상이 상을 “기괴하게 무기화”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노벨위원회가 “도덕적 나침반을 잃었다”고 쏘아붙였다.
미국도 움직였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발표 몇 시간 뒤 ICC 기관 자체를 겨냥한 새 제재를 내놨다. 그동안은 재판관과 검사 개인이 제재 대상이었다. 이 제재가 노벨상 발표와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입장을 내는 대신, 필라이 재판관과 노벨위원회를 비난한 한 변호사의 글을 트루스소셜에 공유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인 필라이 재판관은 인종 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변호사로 일을 시작했다.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 시절에는 전쟁 중 성폭력도 집단학살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냈다. 지금은 미얀마의 로힝야족 집단학살 의혹을 다루는 ICJ 재판에 임시 재판관으로 참여하고 있다. ICJ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법적 다툼을 다루는 유엔 법원이다.
시상식은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다. 필라이 재판관은 노벨연구소와의 통화에서 이 상이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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