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연합(EU)의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AI로 형상화한 모습이다.
무쇠 바이스의 조(Jaw) 부분에 미국과 EU 국기가 배치돼
러시아 1루블 동전을 옥죄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AI로 형상화한 모습이다. 무쇠 바이스의 조(Jaw) 부분에 미국과 EU 국기가 배치돼 러시아 1루블 동전을 옥죄고 있다.

요즘은 ‘경제제재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제재가 일상화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연관한 대러시아 제재, 이란 전쟁과 연관한 대이란 제재 등은 점점 확대되고 있고 북한 핵문제와 연관한 대북 제재도 완화의 조짐이 없다.

국제 제재를 전문적으로 연구 추적하는 국제 제재 데이터 베이스(GSDB)의 최신 발표(GSDB R5)에 따르면 1949년부터 2025년까지 1794건의 제재가 이루어졌다. 이는 이전 발표(GSDB R4)가 1547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것이다. 1794건를 유형별로 분류해 개별 건수를 합산하면 그 숫자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를 들어 GSDB의 분류 항목에 있는 개별 무역 제재(수출 및 수입 제재로 세분화되며, 각각 부분적 또는 완전 제재), 무기 제재, 군사 지원 제재, 금융 제재, 여행 제재 및 기타 조치를 합산하면 수만 건 이상이 된다.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 영향권의 경제 규모는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 이상에 달한다. 이는 1960년대 약 4%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치 증가다. 이를 국가 숫자로 설명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체 국가의 약 27%~30%가 어떤 형태로든 제재 대상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제재가 서방의 일방적인 무기였다면,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금융의 우회로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지자 제재 대상국들이 브릭스(BRICS) 등을 통해 자신들만의 우회로와 대체 결제망을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제재는 늘어나고 강화되고 있지만, 제재의 ‘평화 유지 효과’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 2026년 현재 국제 사회의 큰 고민거리다.

제재는 무역을 완전히 단절시키기보다 무역 경로를 재편하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에너지 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가속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석유 공급량의 15%~20% 이상은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는 국가(러시아, 이란 등)에서 나온다. 서방의 금지 조치는 대규모의 ‘그림자 선단(Shadow Fleet)’과 합법·비합법 원유를 섞어서 국적을 세탁하는 블렌딩에 의해 효력이 한참 떨어진다. 특수한 국가 이익, 혹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이유로 경제 제재의 예외적 적용을 선택적으로 실행하는 모습들도 제재의 효력을 반감시킨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은 비단 제재 준수 의무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인 중국이나 인도 등을 제외하더라도 제재 발동 국가들에서도 나타난다. 유럽은 지금까지 22차례의 대러시아 합동 제재 패키지를 발동하면서 겉으로는 전쟁 자금 조달의 황금알인 러시아 에너지의 시장 차단을 외친다. 하지만 실제로는 에너지 교역은 단절되지 않았고 올해는 사상 최고로 많은 러시아 가스(LNG)를 수입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에너지 무역의 상당 부분이 서방의 전통적인 은행 및 보험 시스템 밖에서 운영되고 있다. 중국, 인도를 포함해 세계 GDP(PPP기준)의 약 40%를 차지하는 국가들(BRICS 블록 등)은 서방의 제재 집행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미 달러화가 아닌 자국 통화 결제 무역을 점점 더 늘리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은 경제제재를 훨씬 정밀하고 촘촘하게 강화하고 있다. 과거의 경제제재가 특정 국가 전체를 봉쇄하는 무차별적 방식이었다면, 현재는 ‘핀셋형 공급망 차단’과 ‘우회로 봉쇄’에 집중하고 있다. 중국, 인도와 같은 대국들이 빠져나가기 힘들게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와 지분율·우회 소유 구조까지 추적하는 지배구조 규정(Affiliates Rule)을 극도로 정밀화하고 있다.

진영이 쪼개지더라도 글로벌 공급망은 여전히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게 현실이다. 때문에, 제재를 가하는 주체(미국·EU 등) 역시 자국이나 핵심 동맹국의 치명적인 타격을 막기 위해 반드시 ‘예외적 면제 조항’을 남겨둘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집행과정에서는 동맹 간의 미세한 균열(Divergence)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 영국, EU가 동일한 적(러시아, 이란 등)을 두고도 각국의 자국 이익에 따라 제재의 범위와 강도를 조금씩 다르게 적용하면서 현실에서는 기업들이 준수해야 할 규범적 미로가 훨씬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EU가 대러시아 제재를 가하면서도, 자국 해운업 타격을 우려한 그리스의 요구를 수용해 제3국행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 운송을 한시적·예외적으로 허용한 것, 중부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산 원유의 차단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해 예외 조치를 받았던 것, 일본이 사할린 에너지 2에 대해 자국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이유로 제재 예외 조치를 인정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벨기에가 자국 결제예탁기관 유로 클리어에 동결된 러시아 예금 자산에 대한 유럽의 활용론에 대해 러시아의 사법적 보복의 위험을 들어 격렬히 저항해 이의 활용을 좌절시킨 것, 그러면서도 동결 자산에서 파생된 이자에 부과한 ‘자국 세금’의 일부를(법인세로 연간 6억-17억 유로 정도)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유럽의 지원과 대러 제재에 동참한다는 명분을 챙긴 것 등도 비슷한 사례다.

프랑스와 룩셈부르크는 지난 9월 친푸틴 올리가르흐(러시아의 재벌) 알리셔 우스마노프와 미하일 프리드만에 대한 유럽의 제재 해제를 관철시켰다. 자신들이 제재 면제를 요구하는 우스마노프와 프리드만을 제외해주지 않으면 유럽연합의 제재 리스트에 올라있는 3000여명 전체에 대한 제재 연장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압박한 결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대러 제재가 가해지면서 자금과 자산 등이 묶인 러시아 올리가르흐들은 제재 면제를 위해 각종 소송과 로비를 벌이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프랑스와 룩셈부르크가 취한 행동은 한편으로는 대러 제재 및 공세의 압박을 취하면서도 다른 측면에서는 특수한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제재 면제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들이다.

결국, 앞으로의 국제 정세에서 ‘제재 면제 능력’은 단순히 법적 로비를 잘하는 것을 넘어 국가 안보 및 거시경제 전략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라 제재의 틈새를 찾아 합법적인 ‘면제(Exemption)’와 ‘예외 조항(Carve-out)’을 따내는 외교·비즈니스 역량이 국가와 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핵심 능력의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한국의 대러 제재 준수 및 대응 전략, 대북 제재 준수 및 대응 전략은 디테일과 실행 과정에서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한국은 국제 제재 체제의 모범 준수국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실행 능력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과 러시아는 제재라는 말이 무색하게 밀착과 준동맹의 행동을 보이고 있고, 한국의 주요 경쟁국인 중국은 제재에 대해 아주 소극적이며, 일본은 자국 천연가스 소비 총량의 9% 정도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을 에너지 취약성을 들어 제재 예외 조치를 받는 등 사안별 실리를 착실히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쟁국이나 안보에 대한 최대 위협국이 에너지 수입이나 기타 협력에서 제재 예외를 인정받거나 아예 제재를 무시하면서 자국 경제에 비교 우위를 지켜주는데 반해, 한국의 제재 면제 노력이나 행동은 사실상 미미하다. 비록 한국의 사할린산 천연가스 장기도입 물량의 제재 예외를 계약 만료기간 만큼 인정받았지만 비중있는 제재 예외조치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이 국제 체제의 일원으로서 국제적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재의 시대에도 악마는 여전히 디테일에 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북극 해빙 시대를 맞아 러시아가 발주한 북극 쇄빙선의 주요 수주국이었고 자동차, 첨단 가전 등에 있어서도 러시아 시장에서 경쟁력 1위권의 국가였다.

하지만 제재 4년이 지나면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은 현격하게 떨어졌거나 시장에서 사실상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조선 3사는 러시아 기업들과 막대한 금액의 소송전에 시달리고 있고, 주요 기업 뿐 아니라 중소 기업들의 대러 수출도 눈물 겨운 이야기들이 많다. 이 기간 권위주의 연대와 비서방 국가들의 유라시아 점유율 및 존재감은 커지고 있고, 유럽과 일본 등의 제재 면제 건수와 면제 비중의 중요성은 점점 다양해지고 커지고 있다.

제재의 의무 수행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경쟁국이나 유럽 연합처럼 국익이 걸려있거나 특수한 이해 관계가 있는 영역을 발굴하는 노력을 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고, 제재 면제를 받기 위한 노력과 논리와 협상력을 의미있게 보여주는 모습들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분단국으로서 북한 이슈와 같은 특수한 안보 이익의 문제, 재러 동포 및 사할린 동포 문제와 같은 인도적 문제, 국가 생존을 위한 에너지의 거의 전부를 해외에 의존한다는 에너지 안보의 문제 등이 있다. 이러한 이슈들은 유럽과 일본이 제재 예외를 받아 낸 이슈들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는 명분이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슈들을 우리의 국익에 맞게 조합하고 이에 맞는 대응 논리와 행동을 발굴해 낼 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러 제재 준수를 외치는 행동이 대러 외교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아주 손쉬운 변명이어서는 안된다. 제재 면제 능력이 국익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명제를 떠올리며 논리 개발과 행동의 실적이 필요한 때다.


hongi@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