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지침은 기권표 ‘출석 의결권서 제외’
확인된 상장사 16곳은 모두 출석 의결권에 포함
예탁원·국민연금도 실제 처리 방식 파악 못해
공무원·사학연금 등 다른 연기금도 같은 문제 가능
與김현정 “연기금 기권표 처리 실태 전수 점검해야”
[헤럴드경제=윤채영·송하준 기자]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겠다며 행사한 ‘기권표’가 실제 주총에서는 국민연금이 정한 방식과 다르게 처리돼 온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연금 지침상 기권표는 찬성률 계산에서 제외해야 하지만, 확인된 상장사들은 기권표까지 출석 주식 수에 포함해 계산했다. 기권표가 많아질수록 안건의 찬성률이 낮아지는 구조다.
국민연금은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의결권 행사 내역을 공개해왔지만, 정작 자신이 행사한 기권표가 실제 주총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4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예탁결제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월부터 지난 9월 28일까지 국민연금이 예탁원 전자투표시스템을 통해 기권한 상장사는 16개사(16개 안건)였다. 예탁원이 해당 회사들에 기권표 처리 방식을 확인한 결과 16개사 모두 국민연금의 기권표를 출석한 주주의 의결권 수에 포함해 찬성률을 계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민연금이 정한 기권의 의미와 다르다. ‘국민연금기금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은 기권을 “출석한 주주의 의결권의 수에 산입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기권했지만, 실제 주총에서는 이 표가 출석 의결권에 포함되면서 결과적으로 찬성률을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한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처리 방식이 단순히 찬성률 수치만 바꾸는 데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찬반이 팽팽하거나 가결 기준에 근접한 안건에서는 기권표를 출석 의결권에 포함하는지 여부에 따라 가결·부결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국민연금은 출석 의결권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고 기권했지만, 실제로는 찬성률을 낮춰 의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합병·분할 등 가결 요건이 엄격한 특별결의 안건에서는 기권표 처리 방식이 의결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질 수 있다.
엇갈린 ‘기권’ 기준…예탁원도 최근에야 파악
이 같은 일이 발생한 배경에는 국민연금과 상장사 간 엇갈린 기준이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상장협)의 ‘상장회사 표준주주총회 운영규정’은 “기권표, 무효표는 모두 출석한 주주의 의결권수에 포함한다”고 규정한다. 기권표를 출석 의결권에서 제외하도록 한 국민연금 지침과 정반대다.
전자투표 과정에서도 이 같은 차이는 걸러지지 않았다. 예탁원 전자투표시스템은 국민연금이 행사한 표를 단순히 ‘찬성·반대·기권’으로 구분해 상장사에 전달한다. 국민연금이 기권에 부여한 ‘출석 의결권 수에서 제외한다’는 의미까지 별도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전자투표를 관리하는 예탁원도 두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김 의원실 지적으로 최근에서야 확인했다. 예탁원은 김 의원실에 국민연금 내규와 상장협 표준규정의 차이를 “최근 확인했다”고 밝혔다. 전자투표를 운영하는 공공기관조차 그동안 두 기준이 엇갈린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던 셈이다.
국민연금 역시 자신의 기권표가 실제 주총에서 어떻게 처리됐는지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공단을 통해 김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에 따르면 “특정 주주총회에서 ‘기권’을 출석한 주주 수에 산입했는지 여부는 주주총회를 운영하는 각 회사가 집계하는 사안으로 해당 자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확인되지 않은 기권표도 있다. 2024년부터 올해 9월까지 국민연금이 기권한 안건은 모두 27건으로, 예탁원 전자투표를 이용한 16건은 모두 기권표가 찬성률 계산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나머지 11건은 다른 전자투표시스템이나 서면·현장투표 등을 이용해 실제 어떻게 처리됐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국민연금이 기권한 안건에는 기업 합병이나 분할처럼 높은 찬성률이 필요한 사안도 포함됐다. 2023년 셀트리온·셀트리온헬스케어 합병, 2024년 ㈜한화·SK네트웍스·엔씨소프트 분할, 2025년 현대위아 분할 등이 대표적이다. 국민연금은 이들 안건 대부분에서 주식매수청구권 확보를 위해 기권했다. 다만 이들 안건은 모두 가결돼 국민연금의 기권표가 실제 주총 결과를 뒤집은 사례는 없었다.
국민연금만의 문제 아니다…다른 연기금도 같은 구조
이 같은 문제는 국민연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무원연금·사학연금 등 다른 연기금이 행사한 기권표도 상장사의 집계 기준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될 수 있어, 연기금 전반의 기권표 처리 실태를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년 1월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전자주주총회 개최가 의무화돼 전자적 방식의 의결권 행사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처럼 연기금이 의도한 기권의 효과와 실제 주총에서의 처리 방식이 엇갈리는 구조가 이어질 경우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탁원은 김 의원실에 “향후 출석 주주 의결권 수 산정 시 기권 행사 의결권의 처리방향과 관련해 법무부, 상장협, 금융위 등과 적극 소통·협의하겠다”고 답했다.
김 의원은 “국민연금은 반대할 이유가 없어 기권했는데, 정작 주총장에서는 그 기권표가 반대표처럼 작동해 왔다”며 “국민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최대 기관투자자의 의사가 거꾸로 반영될 수 있는 구조를 국민연금도, 예탁원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정작 자신이 던진 표가 어떻게 집계되는지는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며 “금융위원회와 보건복지부, 법무부는 예탁원·상장협과 함께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기권한 상장사 전반의 기권표 처리 실태를 전수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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