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철강 시장이 역사적 대전환의 격랑 속에 있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의 강풍과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공존하는 가운데, 국가 간 철강 주도권 다툼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2026년 현재, 우리는 지형의 변화를 직시하게 만드는 두 개의 결정적 장면을 맞닥뜨리고 있다.
첫 번째 장면은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펼쳐진다. 국내 대표 철강기업인 현대제철과 포스코가 손잡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북미 전기로 제철소 착공에 들어간 현장이다. 1970~80년대 노동쟁의와 경쟁력 상실로 녹슬어버린 ‘러스트 벨트(Rust Belt)’의 아픔을 겪었던 미국이 자국 공급망 강화와 첨단 제조 자립을 무기로 다시 철강 산업의 부활을 외치는 순간이다.
두 번째 장면은 한국에서 펼쳐졌다.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용광로의 쇳물을 멈추지 않으며 ‘한강의 기적’을 견인해 온 국내 최대 철강회사가 노사 갈등으로 사상 첫 부분 파업이라는 진통을 겪은 것이다.
이 두 장면을 겹쳐 보면 한국 철강 산업의 미래에 무거운 경종을 울린다. 지금 글로벌 철강 시장은 만성적인 공급 과잉, 수요 둔화, 높아지는 각국의 무역장벽으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여기에 천문학적 투자가 동반되어야 하는 탄소배출 감축까지 절박한 생존 게임이 한창이다.
한때 제조업을 외면했던 선진국들조차 산업 생태계의 뿌리인 ‘철강’을 지키기 위해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기업들은 과감한 해외 거점 확보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제조업의 핏줄인 철강 현장이 대결과 투쟁으로 흔들린다면 그 여파는 개별 기업을 넘어 자동차, 조선, 건설 등 국가 전방 산업 전체로 번지게 된다.
한번 식은 용광로의 온도를 다시 올리기까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듯, 무너진 산업 경쟁력과 글로벌 신뢰 역시 쉽게 회복될 수 없다. 미국이 수십 년간 겪었던 제조업 몰락의 고통을 우리가 되풀이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은 지나간 시대의 낡은 구호가 아니다. 대전환기 속에서 회사는 미래 생존을 위한 체질 개선과 기술 혁신에 사활을 걸어야 하고, 노동조합 역시 상생과 협력의 패러다임으로 국가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 노사 대결이라는 과거의 유산에 발목이 잡혀 허비할 시간이 없다.
철강이 멈추면 대한민국 경제의 엔진도 멈춘다. 생존의 갈림길에서 노사가 극적 타결과 지혜를 발휘해 대한민국 철강사가 그동안 쌓아 올린 자부심을 지켜 내길 강력히 촉구한다. 지금은 쇳물을 멈출 때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용광로의 불꽃을 더 뜨겁게 피워 올릴 때다.
이경호 한국철강협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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