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립지 위에 일렁이는 은빛 초지
서리 내린 들판 덮은 노란 카펫
돌리네 분화구 감싼 억새 능선길
500m 노란 흙길 너머 소백산 전경
맑은 연못에 비쳐 든 붉은 우화정
160만 평 갯벌 가르는 갈대와 낙조
[헤럴드경제=김명상 기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며 주변 풍경도 조금씩 표정을 바꾸고 있다. 산과 들이 녹음을 거두고 황금빛과 다홍빛, 은백색의 숨을 고르는 시기다. 가을 여행은 계절의 결을 따라 걷는 여정이자, 자연이 건네는 온전한 쉼을 찾아 나서는 과정이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천년 고목의 그늘과 구릉을 덮은 억새 물결, 산사의 고즈넉한 흙길, 붉은 아기단풍, 갯벌 위 갈대밭이 펼쳐지는 명소들을 살펴봤다.
매립지 위에 피어난 은빛 초지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은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를 복원해 조성한 19만㎡ 규모의 생태공원이다. 해발 98m의 완만한 평탄면에 대규모 억새밭과 초지, 풍력발전기, 전망 데크를 갖춰 수도권에서 접근성이 가장 높은 가을 명소로 꼽힌다.
10월 중순부터 꽃대를 올리는 억새는 청명한 가을볕 아래 은빛으로 일렁이다가 해 질 무렵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을 머금으며 따스한 황금빛으로 물든다. 바람이 능선을 쓸고 갈 때마다 거대한 초지가 파도처럼 눕는 장관이 연출된다. 북측과 남측 전망 데크에 오르면 발아래로 굽이치는 한강과 도심 빌딩 숲, 멀리 병풍처럼 두른 북한산 능선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매년 10월 중순 ‘서울억새축제’ 전후로 야간 조명이 점등되며, 축제가 끝난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에는 인파가 다소 분산되어 한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도보 진입이 어렵다면 공원 입구에서 운행하는 친환경 전기차(맹꽁이 전기차)를 통해 정상부로 이동할 수 있다.
천년 세월 품은 수관과 황금빛 낙엽 층
SNS에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들녘에 자리한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령 800~1000년으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제167호다. 높이 32m, 가슴높이 줄기 둘레 16.27m, 밑동 둘레 14.5m에 이르는 초대형 독립수다.
사방으로 균형 있게 뻗은 가지는 동서 폭 31m, 남북 폭 28.7m로 고르게 퍼져 거대한 황금색 돔 형태의 수관을 이룬다.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선 고목은 가을 햇살을 오롯이 받아내며 비현실적인 공간감을 빚어낸다. 통상 10월 말을 전후해 잎 전체가 샛노란 빛으로 물든다. 서리가 내리면 잎이 일제히 쏟아지면서 반경 15m 지표면 위로 발이 푹신하게 묻힐 만큼 두터운 황금빛 카펫이 깔린다. 인근 영동고속도로 문막IC에서 차량으로 약 10분 거리이나, 절정기 주말에는 진입 농로와 임시 주차장에 병목 현상이 발생하므로 이른 아침 방문이 권장된다.
고원 능선과 돌리네 지형이 빚은 억새 파도
강원도 정선군 남면에 위치한 해발 1119m의 민둥산은 정상부 일대 약 66만㎡(20만 평)에 걸쳐 완만한 억새 군락이 형성된 국내 대표 억새 산행지다. 과거 산나물 채취를 위한 화전 소각으로 교목이 사라진 자리에 억새가 뿌리를 내리며 가을 산야를 완성했다.
석회암 지대 침식으로 움푹 꺼진 접시 모양의 ‘돌리네’ 지형이 정상부 주변에 완만한 분화구처럼 놓여 있고, 그 굴곡진 사면을 따라 억새가 빽빽하게 춤춘다. 한낮에는 눈부신 은백색 바다를 이루다가, 오후를 넘겨 석양이 비껴들면 능선 전체가 적갈색과 황금빛으로 타오르며 고원 특유의 아득하고 장엄한 정취를 자아낸다. 절정기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지속된다.
500m 노란 흙길과 소백산 파노라마
경북 영주시 봉황산 자락에 자리한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종 본찰이다. 국보 무량수전과 조사당 등 유서 깊은 고건축물과 더불어 산세 지형을 활용한 가람 배치가 빼어난 조화를 이룬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약 500m 길이의 진입로는 포장되지 않은 부드러운 흙길로, 양옆으로 늘어선 노거수 은행나무들이 잎을 떨구며 길 전체에 호젓한 노란 융단을 깐다. 천왕문을 지나 가파른 석축을 차례로 딛고 올라 무량수전 앞마당 안양루에 서면, 인위적인 담장 하나 없이 겹겹이 물결치며 단풍으로 물드는 소백산맥 연봉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건축의 절제된 선과 먼 산의 단풍빛이 겹치는 장면에선 깊은 산사 특유의 고요가 묻어난다. 진입로 은행잎은 10월 말 전후로 노랗게 물들며, 주변 활엽수림의 단풍과 함께 11월 초순까지 늦가을의 운치를 이어간다.
우화정 수면 위로 번지는 붉은 아기단풍 터널
전북 정읍시와 전남 장성군에 걸친 내장산국립공원은 큰 일교차와 풍부한 일조량 덕분에 단풍의 붉은 채도가 유독 짙고 투명하다. 자생 단풍 중에서도 잎 크기가 성인 손바닥 3분의 1 수준으로 잘고 9~11갈래로 나뉘는 고유종 ‘아기단풍’이 숲을 다홍빛으로 채운다.
내장사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우화정은 내장산 가을의 상징적인 포토존이다. 맑은 연못 한가운데 날개를 편 듯 처마를 드리운 정자와, 이를 둘러싼 붉은 단풍이 잔잔한 수면에 거울처럼 비쳐 드는 풍경이 압권이다. 새벽녘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면 주변 기암괴석과 단풍림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빚어낸다.
정읍 방면 내장사는 일주문부터 금선교까지 300여 그루의 단풍나무가 머리 위를 완전히 뒤덮어 붉은 빛의 터널을 만든다. 남부 산지 기후상 내륙 중부보다 물드는 시기가 늦어 10월 말부터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하며, 보통 11월 초에 화려한 절정을 맞는다.
광활한 갯벌 갈대밭과 S자 수로 낙조
전남 순천만 연안에 자리한 순천만습지는 약 540만㎡(160만 평) 규모의 갈대 군락과 염습지로 이뤄진 연안습지보호지역이다. 동천과 이사천이 합류해 순천만 갯벌로 흘러드는 하구 기수역에 위치해 키 2~3m의 갈대가 끝없는 숲을 이룬다.
갈대밭 사이로 놓인 목재 데크길을 걸으면 갯바람이 지날 때마다 갈대 이삭들이 몸을 부대끼며 서걱거리는 계절의 소리를 들려준다. 데크길 끝에서 완만한 숲길(편도 20분)을 올라 용산전망대에 서면, 썰물 때 부드럽게 드러나는 S자형 갯골 수로와 둥글게 모여 선 갈대 군락, 붉은 낙조가 갯벌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갈대 이삭이 은빛과 갈색으로 여무는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는 시베리아를 건너온 천연기념물 흑두루미와 노랑부리저어새, 재두루미 등 겨울 철새들이 군무를 이루며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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