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 산업의 한 분야를 넘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생성형 AI의 등장 이후 불과 몇 년 사이 AI는 연구실과 데이터센터를 넘어 산업과 행정, 교육과 의료, 국민의 일상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제 AI는 하나의 기술을 넘어 국가 경쟁력과 산업의 판도를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다.
ETRI는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ETRI는 대한민국 ICT 발전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했다. 수많은 기술적 도전을 통해 대한민국이 ICT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과거의 성공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50년의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선진 기술을 빠르게 따라가야 했던 시절에는 목표가 분명했다. 앞선 기술을 추격하고 국산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 ICT는 세계 기술 경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특히 AI는 어느 나라에도 완성된 정답이 없는 새로운 영역이다. 그렇기에 ETRI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기업이 이미 잘하고 있는 분야에서 기업과 경쟁하는 것이 정부출연연구원의 역할은 아니다. 기업이 당장 투자하기 어렵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 5년 뒤와 10년 뒤 국가와 산업이 필요로 할 기술을 먼저 내다보고 준비해야 한다.
AI 과학자, 피지컬 AI, AI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안전한 AI, 온디바이스 AI, AI-Native 6G와 위성통신, 산업·공공 분야의 AI·DX가 대표적이다. ETRI는 AI라는 두뇌뿐 아니라 이를 움직이는 컴퓨팅과 네트워크, 반도체, 데이터, 소프트웨어와 응용 기술을 폭넓게 연구해 온 대한민국 대표 ICT 연구기관이다. 반세기 동안 축적한 역량을 하나로 연결해 국가 AI·ICT 연구개발 플랫폼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앞으로 주목해야 할 분야가 피지컬 AI다. 지금까지 AI가 주로 화면 안에서 사람의 질문에 답했다면, 앞으로 AI는 현실 세계를 보고 듣고 판단하며 직접 움직이게 될 것이다. 로봇과 자동차, 공장과 각종 기기가 AI와 결합하면서 디지털 세계의 지능이 물리적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ETRI가 연구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AI 안내 로봇은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를 잘 보여준다. AI가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사회적 약자의 삶을 도우며, 국민이 보다 안전하고 편리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만들고 싶은 AI의 모습이다.
ETRI가 ‘AI·DX 혁신으로 이끄는 함께 사는 따뜻한 세상’을 비전으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 비전을 실현하려면 기술뿐 아니라 연구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ETRI는 국가 임무 중심의 크고 도전적인 연구를 강화하고, 연구자들이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갈 것이다. 조직과 과제의 경계를 넘어 역량 있는 연구자가 자유롭게 동료를 모으고 새로운 연구와 창업에 도전하는 ‘경계없는 플레이어(Borderless Player)’도 키워 나가고자 한다. 개별 연구실과 조직에 흩어진 역량을 연결하고 대학과 기업, 다른 출연연과 협력하는 개방형 연구 생태계도 더욱 넓혀야 한다.
ETRI의 시선은 오늘이 아니라 5년, 10년 뒤를 향해야 한다. 지난 50년 대한민국이 ICT 강국으로 성장하는 길에 ETRI가 함께했다면, 새로운 50년에는 대한민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을 먼저 열어야 한다.
연구자가 마음껏 상상하고 도전하며 그 성과가 산업으로 이어지고 국민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곳, 대학과 기업, 출연연과 세계의 연구자들이 모여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드는 국가 AI·ICT R&D 플랫폼. 그것이 AI 시대에 ETRI가 가야 할 길이며,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우리의 역할이다.
박세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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