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반도체 단발 엔진에 의존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2030년 이후 역성장 국면에 들어설 수 있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이 나왔다. 반도체 초호황에 올해 경제성장률이 순항하고 있지만 슈퍼사이클이 끝나면 허약해진 경제 체력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경고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한국의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며 “국가 차원에서 낙관론 이면의 리스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KDI가 12일 한국경제학회, 니어재단과 ‘한국경제: 지금 서 있는 곳, 가야 할 길’을 주제로 공동주최한 경제정책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반도체 초호황 착시에 가려진 한국경제의 진로에 대한 제언이 쏟아졌다. 김미루 KDI 연구위원은 한국의 장기 경제성장률이 1990년대 초부터 5년마다 약 1%포인트씩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2030년경부터 역성장이 시작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KDI는 잠재성장률 하락의 핵심 원인으로 총요소생산성 증가세 둔화를 꼽았다. 같은 노동과 자본으로 더 많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능력의 개선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한국 경제의 고속 성장을 이끌었던 ‘추격형 경제 모델(Fast Follower)’이 구조적 한계에 부딪힌 반면 ‘선도형 경제 모델(First Mover)’로의 이행은 더딘 현실 때문이다.
KDI 진단은 지금 잘나가는 한국경제와는 동떨어진, 비관적 전망으로 보일 수 있다. 올해 수출은 글로벌 인공지능(AI) 투자 붐에 올라탄 반도체 특수로 ‘꿈의 1조달러’에 도달할 것이 유력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2.6%에서 3.7%로, 내년 전망은 1.9%에서 2.6%로 높였다. 올해 상향 폭은 주요 20개국(G20) 중 1위고 사상 첫 국민소득 4만달러 진입도 가시권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은 한국의 반도체 메모리 패권을 마냥 지켜보지 않을 테세다. 한국 반도체의 최대 구매자였던 중국도 창신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를 앞세워 무서운 속도로 ‘반도체 굴기’에 나섰다.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는 동시에 AI 시대를 이끌 로봇, 원전 등 주요 산업에서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한 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 산업대전환을 통한 경제체질 개선, 저출생·고령화 시대에 부합하는 노동시장 개혁 등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누리는 지금이 경제 기초체력을 높일 수 있는 골든 타임이다. 우리 기업들이 선도형 시장에서도 앞서 뛸 수 있도록 정부는 혁신의 기반을 만들고 규제를 합리화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mhj@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