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폭설날, 9시간 폐지수집해봤다…손에 쥔 건 단돈 4000원”
새벽부터 함박눈이 내리던 지난 26일,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서울 용산구에서 폐지 수집을 체험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박혜원 기자]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새벽부터 쌓인 눈에 길은 이미 얼어붙기 시작했다. 갈비뼈에 통증이 느껴진다. 리어카와 폐지 무게를 합하면 70㎏, 당연한 일이다. 리어카가 기울어지면 애써 모은 폐지들이 떨어진다. 허리를 펼 수도 없다. 너무 바닥만 봤다간 자칫 행인과 부딪힐 수도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롭다. 100m 남짓한 거리를 오르는데 꼬박 30분이다. 오르막길 끄트머리에서 안간힘을 쓰던 순간, 리어카가 가벼워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무게를 받쳐주고 있었다. 감사인사를 하려 뒤돌아보니 이미 발걸음을 옮긴 후다. 평지에서 쉬길 잠시, 멀리 다시 오르막길이 보인다.

[영상] “폭설날, 9시간 폐지수집해봤다…손에 쥔 건 단돈 4000원”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사회부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 체험을 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26일 기자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 남산 인근 주택가에서 직접 폐지 수집에 나섰다. 결코 적지 않은 노인들의 생계수단인 폐지에까지 덮친 불황의 무게를 직접 체감하기 위해서다. 폐지 가격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지만 마땅한 밥벌이가 없는 이들은 리어카를 끌 수밖에 없다. 도로로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경우도 많아 교통사고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 따르면,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1만5000여명의 노인 중 절반이 기자와 같은 여성으로 추산된다. 종이 수요가 줄어들면서 폐지 가격 역시 2021년 12월 kg당 142원에서 지난달 85원으로 40%가량 떨어졌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자는 이날 9시간 동안 용산구 일대에서 폐지 80㎏을 줍고, 총 4000원을 벌었다. 폭설이 심해져 수집을 멈춘 시간을 빼면 시급 800원꼴이다.

시급 800원, '㎏당'의 노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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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고물상에서 리어카를 대여해 나오고 있다. 임세준 기자

오전 7시, 전날 “20대 여성도 끌 수 있는 리어카를 빌리고 싶다”는 말에 응한 용산구의 한 고물상에 도착했다. 무게 50㎏, 길이 2m에 달하는 리어카가 기자를 기다리고 있다. “손수레로 하면 안 될까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고물상 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이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눈발 속에서 사장은 “손수레가 잘 미끄러져서 리어카가 더 안전하다. 사실 오늘처럼 눈이 오는 날은 날은 폐지 수집하시는 분들도 많이 없다”고 했다. 수집 노인분들의 일감을 뺏지는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마음이 스쳤다.

이때 한 남성이 책과 신문이 가득 든 리어카를 끌고 고물상에 도착했다. 2년째 용산구에서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는 유모(64) 씨는 “며칠 모은 걸 갖다주기만 하러 온 것”이라며 “예전에 비 오는 날 일하다 허리를 다쳐서 열흘 동안 누워만 있었던 뒤로는 무리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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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 체험을 위해 리어카를 끌고 도로를 지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유씨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자 유씨가 리어카를 끌고 차도로 내려섰다. 기자에게 그는 “여기로 내려와야 안 미끄러진다”고 했다. 무거운 리어카를 끌려면 눈이 녹은 차도로 다녀야 그나마 안전하다는 것이다. 엉거주춤 차도로 내려서자 승용차와 버스가 리어카와 불과 수십 ㎝ 거리를 두고 스쳐갔다. 유씨를 따라 고물상과 600m 남짓 떨어진 갈월동 술집골목으로 향했다. 5분이나 지났을까, 허리가 아파 잠시 멈춰서자 ‘빵빵’ 경적 소리가 뒤따른다. 급하게 다시 리어카를 움켜쥐었다.

1시간 지나자 갈비뼈부터 ‘욱신’…“70㎏ 무게 발 떼는 것조차 위태”

골목 곳곳에 배송박스가 놓여 있다. 임세준 기자

유씨가 떠난 뒤 혼자 남은 골목 곳곳에선 술집들이 내놓은 배송박스 등 폐지들이 눈에 띄었다. 방한장갑을 벗고 손가락이 자유로운 반장갑만 끼고 박스를 해체했다. 손가락은 시려왔고, 고통으로 변했다. 박스 10개를 해체하는 데에 20분이 걸렸다. 마지막 박스를 줍던 찰나, 마트 창고문이 열리더니 팔 하나가 나와 박스를 밖으로 던졌다. 박스를 다시 챙겨 리어카에 실었다. 차곡차곡 폐지를 접어 가지런한 모양새로 내놓은 곳도 있었다. 따로 박스를 정리할 필요없이 리어카에 실으면 끝이었다.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 체험을 위해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수집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전신이 욱신거렸다. 리어카 손잡이에 맞닿는 갈비뼈부터 힘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허리와 팔까지…. 눈에 젖어 더욱 무거운 폐지와 리어카 무게를 감당하면서다. 박스를 해제하다 생긴 듯 손가락의 끝에선 결국 피가 났다. 눈길에 몇 번 발을 헛디딘 뒤로 몸은 더 뻣뻣하게 굳었다.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를 리어카에 싣기 위해 정리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폐지는 생각보다 금방 쌓였다. 무거워진 리어카를 끌고 고물상으로 돌아갔다. 1회차 수거에 모은 폐지는 총 24㎏, 고물상 사장은 손에 현금 1200원을 쥐여줬다. 오전 내내 바둥거린 노동의 값이었다.

사방에서 ‘빵빵’…결국 주차된 차량 긁고 말았다

[영상] “폭설날, 9시간 폐지수집해봤다…손에 쥔 건 단돈 4000원”
폐지 24㎏을 가져다주니 현금 1200원이 돌아왔다. 임세준 기자

“저기요!” 폐지 수집 3시간째, 오르막길 끝 코너를 돌던 때였다. 마트 앞에 주차돼 있던 SUV 문이 벌컥 열렸다. 코너를 돌다 차량의 뒷범퍼를 긁은 것이다. “죄송하다” “괜찮다”는 말이 족히 열 번은 오갔다. 차주로부터 받은 견적서엔 54만원이 찍혀 있었다. 폐지 무게로 환산하면 4590㎏에 달하는 금액이다.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사회부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 체험을 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폐지 수집 노동은 시급 800원 정도. 하루평균 11시간(한국노인인력개발원 연구)을 폐지 수집 노동을 하는 노인들이 두 달을 꼬박 일해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다. 도시환경 특성상 이런 사고는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폐지 수집 노인 노동을 연구한 배재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연구위원은 “주택과 차량이 밀집한 곳에서 저임금 고강도 수거 노동을 하다 보니 교통 사고나 긁힘 사고는 너무나 흔하게 발생한다”며 “지자체에서 안전띠나 야광봉을 지급하기도 하지만 환경 자체가 위험해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영상] “폭설날, 9시간 폐지수집해봤다…손에 쥔 건 단돈 4000원”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 체험을 하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수집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차량이 긁히게 되자 마음은 더 급해졌다. 깨끗한 폐지를 고르던 여유는 사라졌다. 공사 현장에 쌓인 폐지의 먼지도, 식당 앞 폐지에 말라붙은 정체불명의 음식물도 어느샌가 개의치 않게 됐다. 이후 오후 4시까지 리어카를 두 번 더 채워 각각 30㎏에 1500원, 26㎏에 1300원을 받았다. 이날 번 4000원은 빈곤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후원하는 비정부기구(NGO)단체 ‘지파운데이션’에 기부했다.

1년새 폐지가격 '반토막'…9시간 수집에 손에 쥔 4000원, 4500원 커피는 사치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 체험한 가운데 수집된 폐지 24㎏을 넘기고 현금 1200원을 받고 있다. 임세준 기자

우리 사회 밑단의 생계를 그나마 보전해주던 폐지 값 하락으로 폐지 수거를 포기하는 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고물상 사장 A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루에 20명은 오갔는데 올해는 하루 5명 정도가 고작”이라고 말했다. 이날 일주일 동안 모아온 책과 신문으로 2만원을 번 신모(62) 씨도 “최근에 폐지 대신 고물 수집으로 많이들 옮겨갔다”고 했다.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를 체험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26일 서울 용산구 후암동 일대에서 헤럴드경제 박혜원 기자가 폐지줍기를 체험하며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임세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