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文대통령 고뇌·번민 이해한다며 南 저자세 부각
-北 “南, 김정은 위원장 못 오면 특사 보내달라 청해”
-“신남방정책 귀퉁이에 남북 끼워넣자는 불순한 기도”
[헤럴드경제=신대원 기자]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오는 25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초청했지만 참석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거절한다고 밝혔다.
조선중앙통신을 통한 북한의 발표는 문 대통령의 진정성을 언급하는 등 언뜻 보기에 정중한 모양새를 취했다. 그러나 남측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동시에 남북 정상 간 주고받은 친서 내용을 일방적으로 공개하고 김 위원장 초청 때 마치 저자세를 취했다는 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과 남측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文대통령, 지난 5일 친서 김정은 초청=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는 제목의 글에서 “지난 5일 남조선의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이번 특별수뇌자회의(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해주실 것을 간절히 초청하는 친서를 정중히 보내여왔다”고 밝혔다. 문 대통령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계기에 김 위원장을 공식초청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공개된 내용이다.
통신은 “우리는 보내온 친서가 국무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진정으로 되는 신뢰심과 곡진한 기대가 담긴 초청이라면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며 “우리는 남측이 국무위원회 위원장의 부산 방문과 관련한 경호와 의전 등 모든 영접준비를 최상의 수준에서 갖춰놓고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어 “이 기회라도 놓치지 않고 현 북남관계를 풀기 위한 새로운 계기점과 여건을 만들어보려고 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고뇌와 번민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며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가 온 후에도 몇 차례나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못 오신다면 특사라도 방문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을 보내온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진정성과 남측이 김 위원장 방문에 대비해 경호와 의전 등 최상의 준비를 갖췄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이 김 위원장의 부산 방문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면서 김 위원장이 못 올 경우 여러 차례에 걸쳐 특사라도 보내달라고 청했다는 등 남측 당국의 저자세 논란이 제기될 수 있는 내용도 굳이 부각시켰다. 겉으로는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상대방을 난처하게 만드는 ‘구밀복검’(口蜜腹劍·입으로 달콤한 말을 하지만 뱃속에 칼을 품음)에 다름 아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겉으론 정중하고 수위를 조절한 듯한 거절로 보이지만 단순한 불참 통보가 아니라고 본다”며 “그냥 불참 통보라면 친서로 하든 다른 방법도 많았을 텐데 굳이 통신으로 공개한 것은 북한이 보기에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있는 남측에 가진 불만과 실망감을 담아 이야기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南 성의 고맙지만 부산 가야할 이유 없다”=북한은 문 대통령의 김 위원장 초청 자체에 대해서도 의미를 깎아내렸다. 통신은 “무슨 일에서나 다 제 시간과 장소가 있으며 들 데, 날 데가 따로 있는 법”이라면서 “과연 지금의 시점이 북남수뇌(남북정상) 분들이 만날 때이겠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마른나무에 물 내기라고 이런 때에 도대체 북과 남이 만나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런 만남이 과연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라며 “남조선 당국이 종이 한 장의 초청으로 조성된 험악한 상태를 손바닥 뒤집듯이 가볍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한 오산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민족의 운명과 장래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다른 나라 손님들을 요란하게 청해놓고 그들의 면전에서 북과 남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북과 남 사이의 근본문제, 민족문제는 하나도 풀지 못하면서 북남수뇌들 사이에 여전히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냄새나 피우고 저들이 주도한 ‘신남방정책’의 귀퉁이에 북남관계를 슬쩍 끼워넣어보자는 불순한 기도를 무턱대고 따를 우리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통신은 남측 당국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남조선 당국도 북남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의연히 민족공조가 아닌 외세의존으로 풀어나가려는 그릇된 입장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엄연한 현실”이라고 비난했다. 특히 김연철 통일장관의 방미를 겨냥해 “통일부장관이라는 사람은 북남관계문제를 들고 미국으로 구걸행각에 올랐다니 애당초 자주성도 독자성도 없이 모든 것을 외세의 손탁(손아귀)에 전적으로 떠넘기고 있는 상대와 마주앉아 무엇을 논의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비난했다.
통신은 글 말미에 “다시금 명백히 말하건대 무슨 일이나 잘되려면 때와 장소를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면서 “이런 이치도 모르는 상대와 열백번을 만난들 어떻게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는가”라며 남측 당국에 대한 비난을 되풀이했다. 또 “그 척박한 정신적 토양에 자주적 결단이 언제 싹트고 자라나는가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면서 “남측의 기대와 성의는 고맙지만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부산에 나가셔야 할 합당한 이유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데 대해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