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한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로서의 복잡다단한 속내가 비쳤다.
“최우수 연기상인데, 최우수한 연기를 펼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해서 주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SBS 창사 25주년 특집 50부작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지난달 31일 2015 SAF(SBS AWARDS FESTIVAL)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장편드라마 부문 최우수 연기상을 가져간 배우 유아인의 수상소감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후 유아인의 입에선 왜 잘해서 준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왔다.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아선 ‘육룡이 나르샤’는 지난 2013년까지 SBS가 밝혔왔던 연기대상 후보작 규정에 미치지 못하는 드라마였다.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SBS는 규정을 바꿨다. “전체의 70% 이상이 방송돼야 후보에 오른다”던 규정은 “50% 방송작”으로 변경됐다.
절반 이상 방송으로 후보작 선정 규정이 바뀌자 ‘육룡이 나르샤’와 주말드라마 ‘애인있어요’가 후보에 올랐다. 이 두 편의 드라마를 후보에 올릴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단순하다.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사극판 어벤저스로 불릴 만큼 초호화 캐스팅, 숱한 흥행작(뿌리깊은 나무, 선덕여왕)을 낸 스타작가,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대작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충무로 대세 유아인의 입대 전 마지막 드라마라는 상징성은 SBS가 많은 상을 챙겨주고 싶은 작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애인있어요’는 동시간대 MBC ‘내 딸 금사월’에 밀려 시청률은 저조하지만 온라인 화제성과 팬덤이 탄탄하다. 배우들의 명연기가 매회 화제가 되고, 단지 숫자로만 평가하기엔 아쉬운 작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두 편의 드라마가 후보작으로 오르자 출연 배우들은 연기대상 트로피를 싹쓸이해갔다.
‘육룡이 나르샤’의 유아인(최우수 연기상, 10대스타상, 베스트커플상), 신세경(우수 연기상, 10대 스타상, 베스트커플상), 변요한(우수연기상, 뉴스타상), 윤균상(뉴스타상), 박혁권(특별연기상), 공승연(뉴스타상)이 상을 받았다. ‘애인있어요’의 김현주(최우수 연기상, 10대 스타상, 네티즌 인기상, 베스트커플상), 지진희(10대 스타상, 베스트커플상), 박한별(특별연기상)도 이날 트로피를 챙겨갔다. 두 편의 드라마가 가져간 트로피만 무려 18개였다.
두 작품에서 배출한 수상자의 숫자가 많은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한 해 방송된 드라마를 중심으로 배우들의 연기력과 작품성을 두루 고려할 때 가져갈 만한 사람들이 그간의 노고를 치하받은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대상 후보였던 유아인과 김현주는 ‘용팔이’ 주원에게 대상을 내주며 최우수상으로 만족했다. 김래원은 ‘펀치’를 통해 선 굵은 연기를보여주며 호평받았으나, 난데없이 시상식 당일 대상 후보 명단에서 사라졌다. 김래원은 이날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찝찝함이 남는 연말행사가 아닐수 없다.
물론 드라마 ‘용팔이’에서 주원은 원맨쇼에 가까운 연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허술한 스토리와 구성, 간접광고로 범벅이 된 영상은 배우의 연기로 포장하기에도 구멍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연기대상 시상식은 결국 서로의 입맛과 영향력에 맞춰 골고루 상을 나눠주며 끝이 났다. 배우들은 저마다 고마운 이름을 언급하고 배우로서의 다짐을 전했다. 언제나처럼 누구도 자신들이 주인공이 된 시상식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사람은 없었다.
유아인의 수상소감은 파장이 일 정도로 시상식의 폐부를 찔렀다. 무대에서의 표정과 제스처 역시 마치 영화 속 캐릭터를 보는 듯 과장됐으며,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연기자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말들이 나왔다.
방송3사 연말시상식이 ‘그들만의 축제’가 되고. ‘나눠갖기’ 비난을 사고, 그로 인해 공정성 시비에 오르내린 점을 건드렸다. 실제로 방송사 관계자들은 “스타들의 힘이 커지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예기획사의 숫자가 늘어난 점”을 ‘나눠갖기 시상식’의 이유라고 말한다. 한 방송사의 고위 관계자는 “방송3사 연말 시상식은 권력관계가 전복된 방송사와 연예기획사 간의 이해관계가 만든 결과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방송3사의 연말시상식을 종합하면 “올해에 우리 방송사에 출연해 좋은 성과를 냈으니, 다음해에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다.
유아인은 무대에서 이 점을 언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르겠다. 이 상패 하나에 많은 스토리가 있고 많은 야심이 뭉쳐있고 힘겨루기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러다가도 작품에 임하는 순수성마저 얼룩지는 것은 원치 않은 배우로서의 발언이 이어졌다.
유아인은 “그렇지만 우리의 일은 카메라가 돌고 있을 때 가장 순수하게 연기하는 것이다”라며 “영악하고 여우 같아지고 괴물 같아지는 순간이 많지만 좋은 배우가 뭔지 더 좋은 수준 높은 연기가 뭔지 끊임없이 다그치고 또 다그치고 다그치면서 묵묵히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부담스러울 수 있을 만큼 도드라진 수상소감이었으나, 유아인으로서는 하고 싶은 말은 다 전하고 내려간 무대였다.
‘힘겨루기’와 ‘야심’이 얽혀있는 방송사의 연말시상식에 대한 지적, 그 곳에서 큰 상의 주인공이 된 배우로서의 복잡한 속내, 그러면서도 작품에 임하는 배우로서는 ‘연기’만을 보고 걸어가겠다는 다짐까지 나온 놀라운 무대였다.
방송 이후 선배들까지 한 자리에 모인 ‘축제의 자리’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태도를 언급하는 네티즌들의 지적이 이어졌다. 반대로 개념있는 발언이었다는 반응도 많다.
한 배우의 수상소감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유아인의 소감은 최초의 발언으로 남을 법하다. 스스로 축제의 주인공이었으면서도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 중 유일하게 연말시상식을 겨냥한 발언이다. 시상식 이후도 아닌 생방송 무대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