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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레이지”…안내견도 숨죽인 임윤찬이라는 우주 [고승희의 리와인드]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청년의 대담함 담은 카덴차 압권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8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가졌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비극의 정서는 짙지 않았다. 다만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음울과 불안을 품은 현의 공격에 왼발로 박자를 맞추고, 양발을 번갈아 까딱까딱 하던 임윤찬의 등판. 청아한 비애를 품은 첫 음 이후 음악은 유유히 슬픔의 강을 타고 흘렀다. 음표 하나 하나가 모여 만들어내는 음악은 마디 마디가 저마다의 스토리였다. 조를 바꾸며 반복되는 같은 주제에선 시시각각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27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 24번과 함께 단 두 곡뿐인 단조곡인 ‘피아노 협주곡 20번’. 임윤찬의 연주에 모차르트의 깊은 한숨과 슬픔이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지난 1년 사이 대한민국 최고의 클래식 스타로 떠오른 임윤찬이 돌아왔다. 28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서다.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 타이틀’을 안은 이후 1년이 지났고, 한국에서의 연주는 지난해 연말 리사이틀 이후 처음이다. 이날의 공연은 일찌감치 ‘피켓팅’(피 튀기는 티켓팅) 열풍이었다. 공연 티켓은 예매 오픈과 동시에 전석이 팔려나갔고, 롯데콘서트홀은 ‘만원 공연’답게 2000여명의 관객으로 북적이며 로비에서부터 열기가 가득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8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가졌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이번 공연은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4년 만의 내한이기도 했으나, 이보다 임윤찬의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국내 첫 협연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지난달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았기에 그 사이 부쩍 성장한 임윤찬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높았다.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한여름밤의 꿈’(멘델스존)이 끝난 뒤, 임윤찬의 시간이 시작됐다. 무대 입장을 위한 문이 열리자 넥타이 대신 리본을 맨 임윤찬이 어린왕자처럼 깡총 뛰어 걸어나왔다. 등장과 함께 비명에 가까운 함성이 쏟아졌다.

임윤찬이 한국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조의 정서를 담기에 조금은 가볍게 다가온 오케스트라의 연주 뒤로 이어진 임윤찬은 1악장부터 장기를 발휘했다. 그의 손은 두 사람의 것처럼 따로 놀았다. 왼손의 연주에 맞춰 페달링으로 풍성한 소리를 만들고, 그 위로 영롱한 오른손의 연주를 이어가며 감정을 녹이자 그것만으로 오케스트라와 같은 음향이 만들어졌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선명히 들려오는 오른손과 왼손의 하모니가 마법같은 순간을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8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가졌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2악장 ‘로망스’에선 음표 하나 하나를 보다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뤘다.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회상하는 눈빛은 고스란히 음악이 됐다. 모차르트와 함께 임윤찬은 소년이 아닌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이었다. 명료한 터치는 단 하나의 음표도 버리지 않았고, 건반 위로 정확히 내려 앉아 표현하고자 하는 음색을 만들었다. 아름다운 사랑 안에 상실의 애수가 채워졌다. 지휘를 맡은 미하엘 잔데를링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짓을 하며 독주 피아노를 이어갈 땐 임윤찬만의 모차르트가 설득력을 얻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8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가졌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변칙적인 론도 형식의 3악장으로 접어들면 다이내믹을 조절하는 임윤찬의 특기가 살아났다. 자유롭지만 과장이 없었다. 능수능란하게 이어지는 밀당(밀고 당기기)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스릴이 넘쳤다. 그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명징한 터치, 질질 끌지 않는 단호한 끝맺음이 관객을 압도했다.

이날의 백미는 베토벤의 카덴차였다. 베토벤이 유달리 좋아해 직접 카덴차까지 만든 곡이 바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카덴차는 협주곡에서 악곡이나 악장이 끝나기 직전 독주자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든 무반주 부분을 말한다. 임윤찬의 카덴차는 무엇을 예상했듯 그 이상이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서론에 불과했다. 모든 판을 뒤엎어 산산조각 내버리며 응축된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임윤찬의 해석은 대담하고 과감했다. 그의 음악은 어느새 성숙해져 있었다.

연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마지막 음과 함께 두 손이 올라가자, 2000여명의 관객은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관객들은 기립해 함성을 내질렀고, 임윤찬은 몇 차례의 인사 이후 다시 피아노에 앉았다. ‘클래식계의 아이돌’답게 임윤찬의 모습을 담으려는 셔터 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임윤찬은 모든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급기야 휴대전화 알람 소리까지 울렸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간을 가졌다. 그래야 하는 곡이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를 위한 레퀴엠 중 ‘라크리모사(마지막 진혼곡)’였다. 꾹꾹 찍어누르는 건반마다 임윤찬이라는 우주로 빨려 들어갔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8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가졌다. [롯데문화재단 제공]

앙코르 이후 엄청난 박수와 함성이 또 한 번 쏟아졌고, 임윤찬은 두 번째 앙코르로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를 들려줬다. 모차르트의 비애는 사라진 천진한 연주였다. 곡을 마친 뒤에도 박수가 잦아들지 않자, 임윤찬은 악장과 관객을 바라보며 양손으로 끝이라는 제스처를 세 번이나 취한 뒤 무대를 떠났다. 임윤찬의 등퇴장과 커튼콜마다 객석에 자리한 외국인 관객들은 연신 “크레이지(Crazy)”를 외쳤다. 이날의 일등 관객은 시각 장애인 관객과 함께 온 안내견이었다. 그 어떤 소리도, 뒤척임 한 번도 없이 1열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임윤찬의 음악을 감상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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