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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하는 소리 나올 때 짜릿” 나는 오케스트라를 배우러 간다
‘2023 오케스트라 지휘 과정’ 가보니
음악교사·국악 전공자...수강생 30명
취미·전문 지휘자 과정 꿈꾸며 도전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2015년 공연장 최초로 ‘오케스트라 지휘 과정’을 시작, 생활 속 예술가 발굴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지휘 과정엔 초등학교 음악 교사부터 악단에 소속된 프로 연주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해 새싹 지휘자로 첫 발을 디뎠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신중하게 허공을 가로지른다. 간결하고 정직한 동작 끝에서 태어난 베토벤 교향곡 7번. 국악 작곡과 지휘를 전공,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정인(27) 씨는 긴장한 기색도 없이 프로 악단을 이끌었다. 눈빛 만큼은 ‘지휘계의 신성’ 못지 않았다. 악기 하나 하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연주자들과 눈을 맞췄고, 조심스럽지만 차분하게 호흡했다. 국악과 서양 음악을 아우르는 새내기 지휘자의 출발이었다.

‘새싹 지휘자’의 동작을 꼼꼼히 살피며 음악을 듣던 마에스트로 아드리엘 김은 수많은 말 대신 한 번의 시범으로 조언을 이어갔다. “아홉 번째 마디, 제가 다시 한 번 해볼게요.” 리허설을 할 때는 ‘말보나 손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드리엘 김의 생각이다. 같은 마디가 프로 음악가의 손에서 나오자, 7번 교향곡의 리듬감이 살아났다. 그는 “한 동작 안에 호흡이 있지 않으면 늘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진행 중인 ‘2023 오케스트라 지휘 과정’ 현장. 12주 수업의 막바지를 향하는 수강생들의 얼굴이 상기됐다. 서른 명의 수강생들은 다른 사람의 순서에도 손을 가만 두지 않았다. 음악에 맞춰 지휘 동작을 매만졌고, 악보를 확인하며 차례를 기다렸다. 실기 시험 현장에 와있는 듯한 긴장감이 가득 찼다.

▶지휘자의 요구되는 역량은 ‘소통’= 2015년 9월 국내 공연장 최초로 시작, 해마다 20~30명의 수강생을 배출한 ‘오케스트라 지휘과정’엔 다양한 수강생들이 찾고 있다. 한 번도 지휘를 배워본 적 없는 초보 지휘자부터 초등학교 음악 교사,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중인 연주자, 전문가 마스터클래스를 접하며 지휘자로의 꿈을 키우는 음악가들도 있다.

플루트를 전공한 고은경(33) 씨는 악기만 다루다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지휘에 도전했다. 그는 “악기를 전공한 뒤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플루트 파트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지휘를 배우면 음악적으로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인 씨는 “국악을 공부하면서 서양 오케스트라에도 재미를 느껴 더 자세히 배우고 싶어 도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케스트라 아카데미는 지휘자 아드리엘 김이 이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가 두 번째다.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 그는 “수업엔 워낙 다양한 학생들이 모인다. 올해엔 클래식 음악 전공자들이 꽤 많다”며 “지휘 입문자부터 프로 음악가까지 어우러져 있어 양쪽 모두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도록 지휘에 대한 총체적인 과정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올해는 부지휘자(박혜산)를 통해 입문자들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사실 지휘는 팔을 ‘휘젓는’ 동작만 배운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지휘자들은 “지휘는 사람을 다루는 일”이자, 지휘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소통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지휘는 다른 악기 연주자들처럼 스스로 소리를 내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통해 지휘자가 구현하는 ‘음악’이 완성되는 만큼 지휘자와 연주자 사이의 교감이 중요하다.

아드리엘 김은 “지휘자의 의사결정은 수직적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의 문화는 수평적이다. 그러면서도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며 “지휘자 역시 오케스트라 단원 중 한 명이라는 점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로의 역할이 다를 뿐이지, 단원들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당연히 단원과 지휘자는 존경이 아닌 존중하는 사이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아드리엘 김이 가진 지휘자로의 철학은 ‘새싹 지휘자’의 가치관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은경 씨는 “평소 오케스트라에서 단원으로 앉아 연주할 때는 지휘자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기에 이끌려 간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휘자의 위치에 있다 보니 나의 음악을 같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이 과정에서 아드리엘 김 선생님이 강조한 리더십과 소통 능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꿈나무오케스트라 협업 인상적= 수업은 이론과 실습을 병행한다. 처음 3주는 지휘법 수업과 총보 리딩, 지휘 실습을 갖고, 4주 차부턴 본격적인 실전에 돌입한다. 지휘 과정은 오는 7월 1일 세종체임버홀에서의 연주회로 막을 내린다. 지휘 실습에선 라이브로 음악을 들으며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받는 것이 값진 경험이었다. 이정인 씨는 “오케스트라를 직접 다루는 경험이 많지 않고, 현장 사운드를 들어본 경험이 부족했는데 석 달간의 수업을 통해 충분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아드리엘 김이 수업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본기’다. 그는 “지휘자는 혼자 독보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오케스트라가 필요로 하는 지휘자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요르마 파눌라의 말을 인용, “오케스트라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는 지휘자가 많다. 지휘자는 자신을 객관화 해 오케스트라의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 지를 살펴야 하고, 오케스트라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과정에선 다양한 오케스트라와의 실전 수업을 진행했다. 아드리엘 김이 이끄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과의 실습을 비롯해 앙상블 지휘, 꿈나무오케스트라와도 협업했다. 수강생들이 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은 꿈나무오케스트라와의 만남이었다.

지휘의 어려움과 즐거움은 같은 이유에서 나온다. ‘음악의 완성도’다. 이정인 씨는 “나의 지휘법, 손동작만 보여줘도 원하는 음악이 나오려면 그것이 연주자들에게 충분히 설득이 돼야 하는데 이 과정이 쉽지 않다”며 “하지만 내가 상상하던 음악이 딱 나왔을 때 정말 재밌고 짜릿하다”며 웃었다.

지휘자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을 3개월차 ‘새싹 지휘자’들도 거치고 있었다. 세상에 없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높은 벽에 부딪히면서도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이다. 아드리엘 김은 “클래식 레퍼토리는 한정돼 있고, 우린 옛날 음악을 반복해 연주하기에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며 “불가능한 것들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견지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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