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국내파 발레리나’ 강미선, 21년의 증명…“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 무용수상
유니버설발레단 21년 근속한 ‘순수 국내파’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이 27일 오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미선은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의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중국 국립발레단의 추윤팅과 공동 수상했다.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높푸른 저 뫼는 누굴 위하나, 갈매빛 아라는 내 맘 알까, 저물어가네 타들어가네 (중략) 미리내 길 어디요 꽃가람 길 여기니, 동네방네가 춤추고 나만 홀로 나서” (‘미리내길’ 노랫말)

한국무용을 추듯 응축된 에너지를 품고, 발레의 우아함을 발산한다. 먼저 떠나보낸 남편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한 폭 한 폭 옷자락에 휘감긴다. 강미선에게 무용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2023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의 최우수 여성 무용수상을 안겨준 ‘미리내길’이다.

“한국의 창작 발레를 세계에 알리고, 그 무대에서 한국 발레를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이렇게 상까지 받은 것이 아직도 실감이 안나요.”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강미선(40)은 27일 오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연 수상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의 최고 여성 무용수상은 후보부터 쟁쟁했다. 강미선과 공동수상한 중국국립발레단의 추윤팅을 비롯해 파리 오페라 발레단 에투알 도로시 질베르, 볼쇼이 발레단 수석무용수 엘리자베타 코코레바, 마린스키 발레단 퍼스트 솔리스트 메이 나가히사 등 총 5명과 후보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역대 다섯번째 수상이다. 1999년 발레리나 강수진을 시작으로 김주원(2006년)과 발레리노 김기민(2016년), 발레리나 박세은(2018년)이 이어 강미선이 이 상을 받게 됐다.

27일 오전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열린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문훈숙 단장(왼쪽부터), 강미선, 유지연 지도위원, 유병헌 예술감독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

■ 韓 창작 발레로 첫 수상…“6분 분량 작품으로 후보…조마조마”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한국의 창작 발레 작품이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품은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의 안무작 ‘코리안 이모션’ 중 하나다. 강미선은 지난 3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미리내길’에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과부 역을 선보였다. ‘브누아 드 라 당스’ 후보는 그 해 초연이거나 직전 해에 처음 공연한 작품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미리내길’로 ‘브누아 드 라 당스’ 후보에 올랐지만, 정작 유니버설발레단에선 시상식까지 마음을 졸였다. 쟁쟁한 클래식 발레의 전막 작품을 들고 나온 다른 경쟁자와 달리 강미선이 출연한 이 작품은 고작 6분 분량이기 때문이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은 “해외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발레리나와 겨루는 시상식에서 6분 가량의 영상으로 심사위원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조마조마했다”며 “그간 해외 발레단에 진출한 무용수들이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돼왔다. 국내에서도 세계 수준의 무용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국내파 무용수들에게도 자극이 되는 수상이었다”고 말했다.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 시상식의 심사위원인 유지연 유니버설발레단 지도위원은 “짧은 작품으로 강미선이 가진 무용수로의 강점을 다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여느 작품처럼 서양인에게 익숙한 작품도 아니고,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었기에 한국 무용의 표현 방식과 내면의 정서를 알리고 강미선이라는 발레리나를 알리는 것을 미션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작품의 정서와 강미선이 표현하는 춤을 더 잘 알려주기 위해 유지원 지도위원은 배경음악인 ‘미리내길’의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 심사위원들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선 작곡가 지평권의 앨범 ‘다울 프로젝트’에서 발췌한 국악 크로스오버 곡에 맞춰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아내의 절절함을 그려냈다.

이 작품을 통해 K-발레의 세계 무대 진출 가능성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유병헌 예술감독은 “한국 정서를 담은 한국 창작발레로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한 것은 이번이 최초다”라며 “이런 큰 무대에서 한국의 정(情)과 음악, 창작 발레를 인정해준다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감동을 받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라고 의의를 뒀다. 문훈숙 단장은 “고전 클래식 작품은 대부분 남성 무용수의 남성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많다”며 “‘심청’, ‘춘향’ 등 한국 창작 발레는 늘 남성 무용수 군무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성미가 넘치는 춤과 아름다운 선을 강조한 여성미가 대조가 이루며 한국 창작 발레의 강점이 되고 있다”고 봤다.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강미선 [연합]

■ 21년차 ‘순수 국내파’ 강미선의 증명

강미선은 하루 아침에 등장한 ‘별’이 아니다. 그는 선화예중고를 졸업하고 워싱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를 거쳐 2002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했다. 유니버설발레단 최초의 21년 근속 발레리나다. 코르드발레(군무진)로 입단해 3년 후인 2005년 드미 솔리스트, 2006년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이후 2010년 시니어 솔리스트를 거쳐 2012년 수석무용수가 됐다. 한 단계 한 단계 차근 차근 밟아온 ‘계단식 성장’ 단계를 거친 무용수다. 미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있지만, 오로지 국내에서만 활동한 순수 국내파 발레리나이기도 하다.

그는 “발레리나의 꿈을 꿀 때부터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이 꿈이었고, 이곳에 오고 싶다는 꿈 때문에 유학도 갔다”며 “지금 이 곳에서 인정받고 최고가 된 뒤에 해외에 나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여전히 배워가는 단계이기에 해외 진출을 하지 않은 것에 후회가 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강미선을 오랜 시간 지켜본 문훈숙 단장은 그에 대해 “타고난 재능도 있지만, 예술성과 테크닉, 연기력, 작품 구상 능력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무용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군무부터 올라와 안 해본 역할이 없고, 유니버설발레단의 모든 레퍼토리를 꿰뚫고 있다. 고전이든 현대든, 창작이든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무용수이자 그 책임을 온전히 다해 발레단에선 모범을 보여주는 기둥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미선이 발레를 하면서 한국무용의 정서와 춤의 표현방식까지 잘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6년간 한국무용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적인 춤사위가 들어있는 작품은 어릴 때 했던 동작과 느낌이 남아있어 자신감이 있다. 한국적인 작품을 할 때도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강미선은 국내 무용계에서도 흔치 않은 40대의 워킹맘 발레리나다. 2014년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무용수 콘스탄친 노보셀로프와 결혼, 2021년 10월 아들을 출산했다. 육아와 발레를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그는 스스로를 ‘워킹맘 발레리나’가 아닌 오랜 시간 활동한 한국인 발레리나로 비추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발레뿐 아니라 어떤 분야든 워킹맘으로서 힘들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라며 “사실 내 경우엔 육아의 힘듦과 지침을 발레로 풀어내고 있다. 워킹맘 발레리나라서 힘든 점은 없다”고 말했다.

강미선의 오늘은 그의 지난 21년이 증명한다. 스스로는 “이렇게 오래 한 발레단에서 춤을 출 줄은 몰랐다”고도 말한다.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생각 때문에 부족함을 채우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난 것 같아요. 후배 발레리나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발레리나의 꿈을 갖고 있는 분들이나 발레단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발레리나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무용수가 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고,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shee@heraldcorp.com

연재 기사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