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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대교수도 “내 자식 이공계 안보내” 매년 3만~4만명 해외로
R&D 예산 15% 삭감 여파 현실화
“연구비 80% 깎여 3년 연구 결실 수포로”
“인건비라도 아끼자” 연구실 외국인 채용

“내 자식은 이공계 안 보낸다. 이게 요즘 이공계 교수 사이 농담입니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의대 쏠림을 더 키울 겁니다.” 서울 소재 한 공과대 소속 교수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토로했다.

정부 R&D 예산 삭감 혼란이 이공계 연구 현장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19일 교육계에 따르면 이공계 교수들은 저마다 연구에 차질을 빚은 것은 물론 비용 절감을 위해 대학원생을 조기 졸업시키고 외국인 학생을 채용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올해 R&D 예산을 전년 대비 약 15%인 4조6000억원 삭감한 여파다. 각 정부부처나 기관별 지원을 받아 연구를 진행 중이던 이들은 각자 삭감 내역을 통보받았다. 이공계 교수들이 주로 수행하는 한국연구재단 연구 사업 예산은 최대 90%까지도 삭감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공계 학생 해외로 뺏겨...열악한 처우에 의대로=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3~2022년) 이공계 학생 해외유출 인원이 총 33만9275명으로 추산됐다. 매년 3만~4만명의 이공계 인재가 해외로 나간다는 얘기다.

이 기간 초중고·대학 학령인구는 약 940만명(2013년)에서 750만명(2022년)으로 190만명(20.2%) 감소했다. 매년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을 고려해도 해외로 떠나는 이공계 유출 규모는 꾸준했다.

각 대학이 처한 이공계 위기 현황은 대학원 정원 미달 상황에서도 확인된다. 2023학년도 서울대 대학원생 선발에선 공과대 석사과정 중 60% 이상이 미달됐다. 석·박사통합과정은 전체 학과 중 90% 이상이 신입생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석·박사 이후 이공계 졸업생이 많이 가는 연구소의 처우가 열악해 차라리 의대에 재입학 하겠다는 의사를 표하는 학생도 적지 않다.

예컨대 카이스트(KAIST) 박사를 마치고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들어가면 초임 연봉은 평균 4260만원(2021년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기준)이다. 출연연에 입사해 10년 이상 중견급 연구자가 돼야 평균 보수는 1억원으로 올라간다. 이에 비해 의대 6년과 인턴·레지던트를 마친 의사가 병원에서 근무하면 최소 억대 연봉이다. 2020년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에선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70만원으로 집계됐다. 이공계 재학·졸업생의 처우 문제는 예산 문제와도 직결된다.

▶“연구비 절반 깎여...재료 빌리러 다닙니다”=디스플레이 관련 신소재 개발 연구를 진행 중이던 대학 이공계 B 교수는 연구비 80% 삭감 통보를 받았다. 3년 전 기획을 구상해 지난해까지 예산 계획을 마련한 연구였지만, 올해 1월 갑자기 연구비가 삭감됐다. B 교수는 “이제 막 과제의 꽃을 피워야 하는데 예산을 깎아 당황스럽다”며 “연구를 조기에 중단하거나 목표를 낮춰야 하는데 그렇다면 성공도 실패도 아니다. 결국 ‘돈 줄테니 기존에 하던 연구 끝내라’라고 닦달하는 꼴”이라고 털어놨다.

다른 대학 이공계 C 교수는 요즘 같은 분야 교수진들에게 재료를 빌리러 다닌다. 기존에 진행해오던 5개 연구 과제 중 3개 과제에 대해 각각 절반씩 예산이 깎이면서다. 연구비를 아끼려 궁여지책을 찾은 것이다. C 교수는 “5년 뒤엔 다시 예산이 늘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희망회로를 돌리면서 버티고 있다”고 했다.

D 교수는 “학교 내에서도 교수마다 구체적인 삭감 상황을 몰라 자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사실 절반만 예산이 깎여도 사실상 연구를 중단해야 하는데, 심한 사례론 90%까지 삭감된 사례가 있다”고 했다.

▶“한국인 내보내고, 외국인 뽑자” 교수들 궁여지책=‘연구비 40% 삭감으로 연구 목표치를 유지하거나, 연구비 60%를 삭감하고 목표치를 변경하거나.’ 최근 한 교수가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연구비 삭감과 관련 받은 선택지다. 대신 두 번째의 경우 ‘특별감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달렸다. 이 교수는 “땅을 파서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감사 부담을 피하려면 연구비 40%를 삭감하되 결국 실험 횟수를 줄이고 대학원생을 내보내 부실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연구 부실화는 이공계 교육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교수들이 연구비 절감을 위해 석·박사생을 조기 졸업시키거나 연구 규모를 줄이는 등의 결단을 하면서다. B 교수는 현재 연구 분석 횟수와 해외 출장을 줄이고, 재료비 절감을 학생에게 요구하고 있다. C 교수는 “등록금이 면제되는 외국인 학생을 연구팀원으로 뽑으면서, 국내 학생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비 삭감, 10년 후가 더 문제”=정부는 R&D 예산이 삭감됐지만 대신 젊은 연구자 지원을 늘렸다는 입장이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젊은 연구자의 과제 지원금 뿐 아니라 지원 과제 개수도 늘렸는데, 젊은 연구자들이 나간다고 하니 놀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과기정통부와 교육부는 젊은 과학자 연구 지원 예산을 지난해 대비 2917억원 늘린 8266억원을 편성해, 우수신진연구 신규과제 규모를 759개로 늘렸다.

그러나 이를 실질적으로는 체감하기 어렵다는 것이 현장의 호소다. 지난해 우수신진연구 계속과제를 수행하는 경우 연구비를 10% 삭감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공과대 소속 한 교수는 “평가를 거쳐 일정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 삭감했다면 이해하지만, 일괄 삭감은 납득할 수 없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연구비 삭감 여파는 장기적으로 산업계 경쟁력 악화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 교수는 “이번 연구비 삭감의 진정한 타격은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산업계 전반에 천천히 나타날 것”이라며 “당장 심도 깊은 연구를 해보지 않은 인재들이 관련 기업에 진출하면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고, 결국 해외 기업에 밀리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혜원·안효정 기자

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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