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의 슈퍼스타
탁월한 재능·외골수·어록
내성적 성격·정반대의 연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어… 한 마디로 표현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쑥스러운 표정, 수줍어하는 듯하면서도 느릿한 말투로 ‘단호박 어록’을 만들었다.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으로 약간은 쭈뼛거리더니, 조심스럽지만 확신에 차 이렇게 말하자 현장은 이내 웃음이 터졌다. 지난달 29일 서울 명동 애플 스토어에서 열린 애플뮤직 클래시컬 앱 출시 기념 간담회. 플레이리스트 선정 기준을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 자리엔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 등 언론 관계자들이 다수에 자리했고 일부 음악계 관계자들이 함께 했다. 웃음에 인색한 언론 관계자들이 간담회 현장에서 무방비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사실 이례적인 일이다.
음악계 전문가들은 “임윤찬의 등장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특이점”이라고 말한다. 특이점(singularity)은, ‘어떤 기준을 상정했을 때, 그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점을 이르는 용어’다.
임윤찬과 함께 한국 클래식 음악계는 많은 변화를 거듭했다. 이미 앞서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의 등장으로 클래식 음악계 역시 ‘팬덤화’를 보이기 시작했으나, 임윤찬은 또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굳이 세대 구분을 하자면 200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공동 3위에 올랐던 임동혁(40)이 1세대, 조성진(30)이 2세대라면, 임윤찬(20)은 3세대 격에 해당한다.
임윤찬의 공연은 티켓 예매 1분 만에 매진되고, 100배에 달하는 암표가 등장하며, 프로그램은 구매 제한을 둬도 공연 시작 한참 전 매진 사례를 기록한다. 국내 주요 클래식 공연장 관계자들은 “임윤찬의 리사이틀에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데시벨의 함성이 나온다”고 할 정도다.
임윤찬은 사실 음악계 내부에선 일찌감치 주목받는 영재였다. 이미 2018년 클리블랜드 국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 주니어 부문 2위에 올랐고, 이듬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에서 15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업계에선 반드시 지켜봐야 하는 ‘포스트 조성진’이었다.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며 엄청난 팬덤을 확산한 계기는 단연 미국 반 클라이번 국제 음악 콩쿠르(2022)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이 콩쿠르는 당초 2021년 열려야 했으나, 코로나19로 경연이 일 년이나 미뤄진 덕에 임윤찬은 출전 나이 제한(18~31세) 하한선을 통과해 참가하게 됐다. 콩쿠르 참가 전 임윤찬의 연주회를 계획했던 한 문화재단 측은 “워낙 뛰어난 재능의 피아니스트이기에 함께 할 무대를 꾸미고자 했지만, 당시 임윤찬 측에서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집중해야 한다며 고사했다”고 귀띔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너무도 앳된 소년이 ‘도장 깨기’ 하듯 한 단계씩 진출하는 모습이 전 세계로 생중계됐고, 영상마다 예사롭지 않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현재 상영 중인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는 그 순간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탁월한 재능을 만나면 모두가 정확히 알아본다”는 내레이션이었다.
1차 본선에서 임윤찬이 모차르트 소나타 연주를 마치자, 콩쿠르의 생방송 진행자인 그레그 앤더슨(피아니스트)은 “내 평생 최고의 모차르트였다. 너무 불공평하다”며 감탄했고, 한 심사위원은 “예술, 드라마, 개성, 상상력 등 모든 걸 갖췄다. 이 세상 재능이 아니다”라며 “피아노 연주력의 극치를 들려줬다”고 말한다. 지난해 클래식 명문 레이블 데카(Decca)와 레코딩 전속 계약을 체결할 당시 톰 루이스 회장은 “시대에 한 번 나올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임윤찬이 우리 데카를 선택해 줘서 기쁘다”며 감격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클래식 음악팬들은 재능이 뛰어난 어린 영재의 발굴, 그 영재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유독 좋아한다”고 말했다.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지켜보는 심리와 비슷하다. 임윤찬은 이 조건에 딱 부합하는 음악가였다.
임윤찬의 ‘스타성’은 그가 가진 많은 것들이 만든다. ‘클래식 문외한’조차 알아볼 수 있는 탁월한 재능, 음악에만 매진하는 외골수, 음악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겸손함, 사람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 그 요소다.
그러면서 무대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모습이 너무도 상반된 ‘반전 매력’도 임윤찬의 스타성을 만드는 중요한 요건이다. 여리디 여린 소년의 모습이면서 피아노 앞에선 담대한 영웅처럼 나아간다. 그는 “(손민수) 선생님께서 음악 앞에선 겸손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다 표현하라고 했다. 무대 위에서 절대 내 성격을 보여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크레센도’ 중)는 그의 말이 피아노 앞에서 그대로 보여진다.
임윤찬의 말들 역시 그의 인기에 추동 엔진을 단다. 고작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남긴 말들은 어록에 가깝다. 임윤찬의 말에는 여든 넘은 도인을 품은 듯한 성숙한 음악관과 가치관이 묻어난다. 실제로 몇 차례 언론 간담회와 인터뷰를 통해 전한 임윤찬의 말들은 ‘임윤찬 어록’이 돼 인터넷을 장악한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엔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다”고 했고, 음악에 영감을 준 인물로 다른 누구도 아닌 신라 시대 가야금 연주자 ‘우륵’을 꼽았다. 영화 ‘크레센도’에선 “피아노를 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음악이 꽃을 피우는 것이다. 고립돼 고민하고 외로운 순간에 음악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피아노를 칠 땐) 하늘에 계신 위대한 예술가들을 생각하며 연주한다”고 말했다.
이번 애플뮤직 클래식컬 론칭 간담회에서도 어록은 수차례 나왔다. 그는 직접 고른 ‘피아노의 황금기’ 플레이리스트에 대해 “‘이게 피아노 연주구나, 이게 진정한 음악이구나’ 제게 큰 충격과 희망을 줬던 음악들을 선정했다”며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근본이라고 느꼈던 연주 중 엑기스만 모았다”고 말했다.
임윤찬의 특별함은 이 질문에서 드러났다. ‘인생을 바꾼 음악’을 묻는 질문에 짧지만 강력한 답변을 내놨다. 전 세계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천재 음악가도, 불굴의 의지를 극복한 특별한 재능도 아니었다. “부모님의 음성”이라는 답이었다. 임윤찬이라는 작은 소년 안에 담긴 거대한 우주가 더 알고 싶어지는 답변이었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임윤찬은 말을 맛있게 하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생각과 진실함이 담겨있어 그의 연주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