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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홍 칼럼] 한국정치사의 뒤안길 ‘군부와 권력’

1962년 12월 하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소장이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전두환 대위를 불러들였다. “자네, 국회의원 출마 안 하겠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은 전두환은 깜짝 놀랐다. 군사정부가 약속한 민정이양을 1년도 채 안 남겨둔 시점이었다.

“각하, 제가 어떻게 국회의원을 합니까?” “이봐, 국회의원이 뭐 별거야, 하면 하는 거지 왜 못해?” 박정희는 다시 종용했다. “내년 민정이양을 해야 하는데 자네 같은 사람이 정치에 나서는 것이 필요해. 차지철도 하기로 했으니까 잘 생각해 봐. 이틀 후에 다시 오게.”

차지철은 공수단 대위로 쿠데타에 가담해 박정희의 경호대원이었다. 그는 1963년 소령 제대 뒤 급조된 공화당의 상임위원을 거쳐 그해 6대 국회의 비례대표로 29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다. 7대 총선에서 지역구로 당선되더니 국회 사상 최연소 외무위원장에 올랐고 8대 국회에선 내무위원장이 됐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책임으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나자 그는 4선 의원직을 버리고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들어간다. 그런 경력의 대통령 경호실장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예상했어야 했으나 그것이 대통령 피살의 한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미처 몰랐다.

5·16 군사쿠데타 후 11월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 뒤 공동성명에는 1963년 민정이양 계획이 포함됐다. 민정이양 때 쿠데타 가담 군 출신을 전역시켜 최대한 많이 정치권에 집어넣는 것이 박정희의 계획이었다. 쿠데타와 함께 창설된 군정기구에는 전두환 외에 노태우 방첩대 내사과장과 손영길 최고회의 의장 부관 등 육사11기 출신 대위들이 주요 보직에 기용됐다. 비서실장은 윤필용 대령, 경호대장은 박종규 소령 등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군부와 권력을 주름잡은 정치군인들이 군정기구에 포진했다.

대통령이 장성 진급자의 삼정도에 수치를 달아주는 모습 [연합]

육사11기 재학 때부터 그룹지어 다니던 5성회와 7성회는 쿠데타 후 전두환의 청파동 사저에 수시로 모였다. 군내 비밀사조직 하나회가 결성되는 배경이다.

출마 권유 이틀 후 다시 만난 박정희와 전두환은 의미심장한 문답을 나누었다.

“어때, 생각해 봤나?” “각하, 군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박정희는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쿠데타 직후 이미 장도영 숙청 사건 등을 치른 터였다. 끝까지 권력을 옹위해 줄 친위대가 군부에 뿌리내려야 했다. 그 후 전두환은 중령 때 청와대와 가장 근접거리의 근위부대인 30경비단 대대장, 준장 때 1공수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소장 때 1사단장으로 군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와 하나회의 공동조직자였던 노태우도 9공수여단장을 거쳐 전두환의 후임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바통 터치한 후 9사단장이 됐다.

박정희 운명의 해인 1979년 2월 중순, 국방장관 노재현이 ‘신임 보안사령관에 전두환 1사단장’의 인사안을 갖고 청와대로 갔다. 박정희는 인사자력표를 들여다보다가 한 마디 했다. “이제 막 사단장을 마쳤는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 보안사령관은 사단장을 마친 후 수경사령관이나 군단장을 거친 중장급에서 발탁함으로써 군부 내에서 우위에 서게 하는 인사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신임 보안사령관 인사안은 또 통상 복수안에 순위를 매겨 올려야 하는 원칙에도 어긋났다. 그러나 영남군벌 내부에서 이미 구수협의를 거친 노재현은 자신있게 밀었다. “각하, 서종철 안보특보나 진종채 전임 사령관도 이만한 적임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불과 8개월 후 10·26 정국에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국가권력의 실권자가 되는 보안사령관에 전두환 소장을 두 단계 건너뛰면서 임명하는 파격 인사가 이렇게 결정됐다. 그즈음 그가 수장인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20기까지 20명 이상의 사단장과 공수여단장, 그리고 80명 가까운 연대장과 대대장 등의 실병 지휘관을 거느린 정치군벌로 몸집이 커져 있었다.

군부와 권력의 관계에서 처음 문제를 야기한 권력자는 6·25 전쟁 중 피난수도 부산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개헌을 밀어붙인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1952년 7월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이른바 발췌개헌을 추진하면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군대동원을 지시했다. 이종찬은 군의 정치개입에 반대하며 불응했다. 이에 이승만은 헌벙총사령관 원용덕에게 명령해 국회의원 50여명을 불법 감금했다. 군이 정치에 동원된 이 부산 정치파동은 당시 육본 정보국 대령 박정희에게 군사쿠데타의 학습장이었다.

후진국에 군사쿠데타가 유행병처럼 번진 1960년 전후 정치학자들은 군에 대한 문민통제나 군의 직업주의 개념을 제시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충족시켰다고 평가된다. 오히려 군부의 정치개입이 아니라 이제는 권력에 의한 군부영역 침해를 막아야 할 상황이다. 우선 군의 수뇌부인 고위장성 인사에서 정규 사관학교, ROTC, 3사관학교, 갑종간부 등 임관유형과 출신 지역의 균형, 그리고 정치 중립적인 규범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직업주의 군과 문민통제가 후퇴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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