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최재혁, 화가의 연작처럼 진화…“현대음악은 살아있는 작곡가의 최신 음악” [인터뷰]
신작 ‘오르간 협주곡’ 초연
다음 달 6일 롯데콘서트홀
 
화가처럼 연작 그리듯 작곡
세 번째 변곡점에 쓴 협주곡
젊은 작곡가 최재혁의 신작으로 12분 길이의 ‘오르간 협주곡’이 4년의 숙성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최재혁은 ‘오르간 협주곡’에 대해 “무서움, 두근거림, 긴장감이 가득찬 곡”이라고 했다. [롯데콘서트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새하얀 종이 위에 음표를 그린다.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제 자리를 찾아 내려앉은 음표가 또 다른 음표를 만나 이야기를 만든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었어요. 수채화인지, 유화인지 결정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쓴 시간이었어요.”

2020년 처음 쓰기 시작한 12분 길이의 ‘오르간 협주곡’이 4년의 숙성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젊은 작곡가 최재혁(29)의 신작이다. 다음 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매일 클래식’(10월 6일) 공연에서 선보일 이 곡은 그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앙상블 블랭크와 오르가니스트 최규미가 협연한다. 지휘는 최재혁이 직접한다.

최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만난 최재혁은 ‘오르간 협주곡’에 대해 “무서움, 두근거림, 긴장감이 가득찬 곡”이라고 했다. 짧은 곡 안에 여러 감정이 요동친다. 그는 “아이가 아버지한테 혼날 것을 직감하고 있다가 결국 혼이 나 무서운 상태로 끝나는 느낌, 혹은 썸을 타는 이성에게 긴장 상태에서 고백했다가 엄청난 이벤트를 겪고 상황이 마무리되는 느낌”이라며 “감정적 변화를 많이 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작곡가 최재혁 [롯데콘서트홀 제공]
작곡가로의 세 번의 변화…변곡점에 선 ‘오르간 협주곡’

‘오르간 협주곡’은 가로·세로 40㎝의 작은 그림에서 시작됐다. 마르코스 그레고리안이 그린 작품이다.

“가뭄으로 메마른 땅이 갈라져 울퉁불퉁하고 금이 간 작품을 보면서, 이런 질감을 음악으로도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역동적 질감이 마치 곰보빵 같더라고요. 어쩌면 조금은 거칠고 폭력적일 수 있는 텍스처를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다 고등학교 시절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그의 음악은 몇 번의 변곡점을 맞았다. 이번 ‘오르간 협주곡’은 최재혁이 걸어온 변화의 시기에서도 중요한 지점에 선 작품이다.

고등학교 유학 시절, 잘츠부르크의 여름 아카데미에서 듣게 된 살바토레 시아리노의 음악이 그의 마음을 홀렸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조성 음악이 아니면 예쁘다고 느끼기가 쉽지 않은데, 흔히 생각하는 ‘우당탕탕’하는 현대음악이 아니라 여리여리하고 하늘하늘한, 슈베르트 같은 느낌의 음악이었다”고 말했다. 그날의 ‘청각 충격’은 최재혁의 음악에 첫 번째 이정표가 됐다.

“음악의 불멸성이 느껴졌어요. 전 이 곡이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끝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음악이라고 이해했어요. 그게 너무나 강렬하게 아름다워서 무조 음악을 쓰고 싶다는 계기가 됐고, 그런 미학을 동경하고 따라하던 시기를 거쳐왔어요.”

하늘거리는 음악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불멸’을 이야기한 기간이 2011년부터 5년 정도다. 그 후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온다. 그레고리안의 그림을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최재혁은 “미술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고, 그림을 통해 소리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이 작품들을 통해 긍정적인 의미의 폭력적 음악을 떠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그림을 만난 뒤 ‘오르간 협주곡’이 바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영원성’을 담은 여리여리한 음악은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머뭇머뭇거리고, 숨 막히는 음악”으로 달라졌다. 당시의 음악에 대해 최재혁은 “악기들이 치고 박고 싸우는 소리가 담기길 원했다”고 말했다. 그레고리안의 그림을 만난 그 해 최재혁은 제네바 국제 콩쿠르 작곡 부문 최연소 1위(2017년)라는 성취를 거뒀다.

최재혁의 신작 ‘오르간 협주곡’ 악보 [롯데콘서트홀 제공]

최재혁이 작곡하는 방식은 미술 작가의 작업과 비슷하다. 피카소, 김창열, 이우환처럼 ‘연작’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끈기있게 탐구한다.

“화가들이 연작 시리즈를 내는 것은 그림 하나에 자신의 이상을 모두 담아내지 못해서 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초기작과 후기작은 비슷하면서도 어느 지점에선 성장의 모습이 보이며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더라고요. 저 역시 하나의 작품 안에 제가 추구하는 것을 완벽하게 다 담아내지 못해 마치 연작처럼 하나의 스타일이 몇 년씩 이어졌어요.”

좁은 음역대를 사용해 하늘거리는 음악으로 ‘불멸성’을 표현한 10대 후반~20대 초반을 거쳐 ‘거친 질감’을 담은 불규칙한 리듬으로 긍정적인 폭력성을 담아냈다. 그 때가 20대 초·중반(2018~2021년)이었다. 최재혁은 “그 시절의 작곡 실력에서 최대치까지 도달한 음악이 나오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된다”고 했다. 언젠가 다시 꺼내게 될지라도 현 시점에선 미련없이 ‘하나의 챕터’를 닫는 것이다.

지금은 이 둘의 ‘융합’이 시작됐다. 그 시작점에 해당하는 작품이 ‘오르간 협주곡’이다. 그는 “여리여리함과 거친 질감이 완벽히 잘 섞였는지는 모르겠다”며 “두 가지 미학을 섞어보려 했지만, 어쩌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여러 일정 중 완성된 이 음악은 오래 곱씹었다. 한 달에 한 장씩 써내려갈 만큼 긴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사이 개인적인 경험”도 음악으로 담겼다고 한다. 피렌체에서 만난 석양이 물든 하늘은 오르간 협주곡의 화음으로 표현됐다. 그는 “멘델스존,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처럼 협연 악기가 계속 나오고, 앙상블이 반주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협업하는 곡”이라고 했다.

특히 이 곡은 연주 장소인 ‘롯데콘서트홀’의 특성도 반영됐다. 롯데콘서트홀은 국내 민간 공연장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곳이다. 그는 “롯데콘서트홀은 울림이 크고 잔향이 길다”며 “잔향이 크면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탁탁 끊기기 보단 섞이고, 오버랩 되는 음향을 쓸 수 있어 홀의 특징을 살려 곡을 썼다”고 말했다.

작곡·지휘까지 섭렵…“현대음악은 살아있는 작곡가의 음악”’

최재혁은 ‘성실한 음악가’다. 일찌감치 음악계에서 두각을 보였지만, 새로운 도전과 배움에 주저함이 없다. 20대 초반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작곡가로 있던 진은숙의 마스터클래스를 들으며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숱한 수상 경력이 있지만, 최근엔 또 하나를 추가했다. ‘2023 이스트오베스트 작곡 콩쿠르’(Call for Scores EstOvest Festival 2023)에서도 우승한 것이다.

지휘자로의 활동을 같이 한 이후엔 2018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선 사이먼 래틀과 함께 런던심포니를 지휘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주목받았다. 예르비 지휘 아카데미, 바렌보임 아카데미를 통해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들을 사사했고, 지난 9월 초엔 서울시향에서 만프레트 호네크의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들으며 쉼 없이 공부한다.

“작곡을 하지만, 지휘에도 마음이 끌린 것은 포디움의 지휘자는 마술사 같았기 때문이에요. 악보를 자기 안에서 해석해 없는 것을 즉흥적으로 연주할 때 좋은 감정과 감동이 왔어요. 파보 예르비 선생님은 작곡가를 친구로 여기라고 하셨어요. 지휘를 잘 하기 위해선, 악보를 완벽히 공부하고 내 몸 안에 DNA가 박혀 그것을 주무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깊이 남았어요.” 그는 파보 예르비의 보조 지휘자로 함께 하기도 했다.

최재혁은 공부하는 음악가다. 작곡과 지휘 활동으로 국제 무대에서 두각을 보이면서도, 최근엔 서울시향의 만프레트 호네크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들으며 배움을 놓지 않았다. [서울시향 제공]

여러 스승과의 만남은 작곡가이면서 지휘자인 최재혁의 여정에 등대가 됐다. 그는 “작곡이 혼자 상상을 펼치는 작업이라면, 지휘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호흡하는 작업”이라며 “손끝에서 소리가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곡을 해서 어떤 음악을 만들든, 지휘가 성공적이었든 아니든 이 행위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연을 앞둔 ‘오르간 협주곡’은 아직 리허설도 하지 않아, 작곡가 역시 자신의 곡을 들어보지 못했다. 오르간은 음악가들이 쉽게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아니라 많은 부분을 상상에 의존해 곡을 썼다. 이 안엔 음악가 최재혁이 지나온 시간과 그가 좋아하는 소리와 음악의 지향점이 담겼다.

음악가로의 그의 바람은 “함께 하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현대 음악은 어렵고 난해하다는 편견을 넘어서야 하지만, 그 과정이 어렵지만은 않다. 그는 “현대음악은 살아있는 작곡가들의 최신 음악”이라는 생각으로 ‘오늘의 음악’을 만들고 있다.

“저도 처음엔 현대음악이 어려웠고, 용어 자체도 거부감이 들었어요. 사실 우리가 아는 작곡가들도 원래 하던 걸 해오다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지금의 클래식을 만들었어요. 전통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곡을 만들어가는 것이 클래식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어려울 수 있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미쉐린 후보의 레스토랑에서 권하는 음식 같은 놀라운 경험이 될 거예요.”

sh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