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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뻔한 선곡은 무모...명문 악단과 연주할 땐 전략 필요”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거울
한계 극복 위해 매일 자신과 싸움
임윤찬과 협연, 만화경 탐험한 기분
지휘자 성시연은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오르며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2007년 보스턴 교향악단의 사상 첫 여성 부지휘자로 발탁된 그는 현재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 중이다. [KBS교향악단 제공]

잔잔한 바다 위로 태양이 솟구치는 장엄한 자연을 표현한 칼 닐센의 ‘헬리오스 서곡’, 블랙 씨(Black Sea)·블루 워터(Blue Water)·그린 워터(Green Water)의 색채를 20여개의 타악기로 담아낸 파질 세이의 ‘물’, 마티스 그뤼네발트의 작품(천사의 합주·그리스도의 매장·성 안토니우스의 시련)을 음악으로 묘사한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 교향곡’....

‘뻔한 선곡’은 없었다. 생소한 근·현대 곡에 능통한 지휘자 성시연(48)의 선곡은 이번에도 남달랐다.

“힌데미트의 ‘화가 마티스 교향곡’은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곡이었어요. KBS교향악단에서 수락할 줄 몰랐는데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 했던 것 같아요.” 이 곡은 성시연이 지난해 10월 뉴질랜드 오클랜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서 처음으로 연주한 곡이기도 하다.

마에스트라 성시연의 이름 옆엔 언제나 ‘최초’, ‘처음’의 수사가 따라온다. ‘지휘 거장’ 푸르트 벵글러가 빚어내는 ‘음악의 마술’에 홀려 운명처럼 지휘의 길로 들어선 후, 그는 언제나 ‘자기 증명’의 길을 걸었다. 끊임없는 ‘입증의 과정’은 레퍼토리 선정에서도 나타난다.

KBS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9월 19일·예술의전당) 지휘를 앞두고 만난 그는 “명문 악단과 연주할 땐 전략이 필요하다”며 “이 오케스트라가 100번 넘게 연주한 곡을 가져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용감하고 무모한 곡 선정”이라고 했다.

▶ “매일 매일 느끼는 한계...오늘도 자신과의 싸움”=성시연은 편안한 길을 두고도, 늘 ‘험한 길’을 걷는다.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익숙한 고전이나 낭만보다는 근현대 곡을 주요 프로그램으로 가져간다.

“고전이나 낭만은 악단에서도 저보다 더 많은 방향으로 연주를 해봤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리허설에서 하는 이야기가 단원들에게 어필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해요. 더 좋은 느낌과 인상을 주기 위한 곡을 가져가는 것이 저의 차별화 전략이에요.”

지휘자 성시연이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것은 2006년이었다. 게오르그 솔티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았고, 이듬해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에 오르며 국제 무대에서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됐다. 2007년엔 보스턴 교향악단의 사상 첫 여성 부지휘자로 발탁됐다. 이미 혹독한 과정을 거쳐왔지만, 그는 지금도 매일 매일 한계를 느낀다. 음악가로 ‘정제된 삶’을 살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수백 번씩 견고한 벽에 부딪힌다. “매일의 좌절을 극복하는 것이 음악에서의 휴머니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음악가, 특히 지휘자의 삶은 그만큼 어렵다.

지휘자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음악을 자신의 손 끝이 아닌, 다른 사람(연주자)을 거쳐 만들기 때문이다. 성시연은 “피아노를 공부하다 지휘로 전향한 것도 그 점에 매력을 느껴서였다”며 “다른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주고 받는 화음과 음악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덕분에 지휘자에겐 많은 것이 요구된다. 풍부한 음악성과 지휘 스킬은 기본으로, 말투는 물론 순간 판단력, 원만한 대인관계 등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단원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캐치하는 것, 그리고 그들과의 기싸움에서도 이겨야 한다. 그는 “지휘자는 연주자 없이 혼자 설 수 없는 존재”라며 “단원들과의 호흡과 협동, 조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소통과 인간관계 기술은 결국 ‘좋은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져가야 할 필수 요건이다. 성시연의 철칙은 “리허설은 꼼꼼하되, 연주에선 자유롭게” 단원들을 놓아두는 것이다. 이 목표를 이뤄나가기 위해 음악 이상의 것을 늘 고민한다.

세계 무대에서의 인정은 성시연을 국내로 불러들였다. 서울시향(2009~2013년 부지휘자)을 거친 이후 국내 국공립교향악단 최초의 여성 상임 지휘자로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2014~2017년)를 4년간 이끌었다. 성시연과 함께 한 시간 동안 “경기필의 역량이 국내 최고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해외 무대로 향했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거울이에요. 지휘자가 가진 능력만큼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죠. 제가 해외로 나간 것도 지금의 상태라면 여전히 그 정도 밖엔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어요. 좀 더 큰 지휘자가 돼야 한국 음악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는 아직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지금은 “발전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다.

▶ ‘시대’가 원하는 여성 지휘자...재초청 줄이어=최근 몇 년 사이 성시연을 향한 세계 무대에서의 관심은 더 두드러진다. 2021년엔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콘세르트허바우(RCO) 무대에 데뷔했고, 지난 8월엔 LA필하모닉과 함께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협연을 이끌었다.

임윤찬과의 협연은 성시연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그는 “할리우드볼 1만8000석을 꽉 채운 관객들이 임윤찬 군이 등장하자 엄청난 함성을 보냈다. 윤찬 군의 파워를 느낄 수 있었다”며 “이런 경험은 시애틀에서 조성진과의 협연 이후 두 번째”라고 했다.

“임윤찬은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예요. 변화무쌍한 색채와 감정의 라인이 아름답고 신빙성있죠. 만화경을 보여 함께 탐험하는 기분이 들어요.”

성시연의 커리어가 주목되는 것은 지난 몇 년 사이 ‘재초청’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성시연이 악단의 검증에서 ‘합격점’을 받았다는 의미다.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지난해에 이어 올 11월에도 성시연에게 포디움을 맡겼다. 영국 로열 필하모닉도 내년 2월 다시 성시연을 초청했다.

지금 세계 무대에선 성시연을 포함해 한국인 지휘자 김은선, 우크라이나 출신 옥사나 리니우 등 40대 중후반의 여성 지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는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활동해 온 여성 지휘자들이 많았다. 그 분들이 한 땀 한 땀 쌓아올린 노력의 힘이 컸다”며 “여기에 여성의 발언권, 포지션에 대한 요구가 높아진 시대 분위기가 더해져 여성 지휘자를 많이 등용하고 있다”고 봤다.

성시연이 지휘를 공부하던 시절만 해도 모교인 한스 아이슬러 대학엔 여성 지휘자가 2명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7대 3, 6대 4의 비율로 점차 늘고 있다. 여성 지휘자의 확대는 일종의 음악계 ‘트렌드’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구스타보 두다멜로 인해 남미 지휘자가 인기를 얻은 10년의 시간이 있었고, 그 뒤로 여성 지휘자가 주목받는 흐름이 왔어요. 이 역시 언젠가는 사그라들겠지만 남아있는 여성 지휘자들이 더 많은 활동을 하면, 앞으로는 여성 지휘자에 대한 질문을 받는 것조차 이상할 정도로 남녀 구분 없이 평등한 시대가 되리라 봐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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