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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피의자 신상공개 확대의 정당화 조건
지난달 28일 오전 서울 관악경찰서에서 ‘신림동 흉기난동 사건’ 피의자 조선이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연합]

피의자 신상공개제도는 헌법 제27조 제4항에 규정된 무죄 추정 원칙과 충돌하는 제도이기에 현행법상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인정된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과거에 언론 매체에 의한 신상 공개는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었지만 1998년 대법원 판결 이후 엄격하게 제재됐다. 그런데 2010년 이후로 제한적이나마 신상 공개가 입법화된 것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의해 보호되는 피의자의 인권보다 추가 범행 등에 의해 침해되는 시민의 인권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고려 때문이었다. 물론 중요 사건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 보장도 중요한 근거였다.

최근 ‘부산 돌려차기 사건’ ‘신림 묻지마 살인사건’ 등을 계기로 피의자 신상 공개 확대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미국 등에서는 신상 공개가 훨씬 자유롭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피의자 신상 공개 확대와 관련해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피의자 신상 공개 확대가 피의자를 범인으로 단정하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 이는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무죄 추정 원칙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상 공개 이후에 범인이 아니라고 밝혀진 경우에 피의자가 입은 엄청난 피해를 복구할 길이 없다.

둘째, 피의자 신상 공개의 요건은 엄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의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친지 심지어 소속된 직장 등에도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이른바 현대판 연좌제가 될 우려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셋째, 미국의 신상 공개를 그대로 도입하려 해선 안 된다. 미국에서도 무죄 추정의 원칙은 인정되고 있으며, 언론이 피의자의 신상 공개를 할 경우에는 매우 큰 책임이 따른다. 피의자가 범인이 아닌 것으로 판정된 경우 등 부적절한 언론 보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에 따라 막대한 부담을 지는 것이다. 그런데 징벌적 손해배상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처럼 언론의 신상 공개를 인정하긴 어렵다.

많은 국민이 피의자 신상 공개 확대에 찬성하는 것은 피의자가 곧 범인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피의자가 범인인 것은 아니다. 경찰 및 검찰의 수사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는 경우도 많고,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나중에 진범이 잡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예로부터 열 명의 도둑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널리 인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행법상 피의자 신상 공개의 대상을 살인, 인신매매, 강도, 강간 등의 중대 범죄와 통계적으로 재범 위험성이 매우 높은 성폭력범죄에 한정하고 있는 것도, 그 요건과 관련해 공익적 필요성 이외에 범인으로 믿을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점들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까지 나서서 피의자 신상 공개의 확대를 거론한 것은 국민 여론이 그만큼 뜨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피의자 신상 공개의 확대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만일 신상 공개의 확대 이후 부적절한 신상 공개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 역풍은 더욱 심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0여년의 피의자 신상 공개에 대해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은 것은 신상 공개 대상자 중에서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상 공개를 확대할 경우에는 그럴 위험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것 등의 요건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상 범죄를 확대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이를 모든 범죄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기준으로 어디까지 확대할 것인지도 문제가 된다. 현행법상의 특정강력범죄와 성폭력범죄 외에 어떤 범죄를 신상 공개 대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는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을 예로 들어 이런 경우도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단순 폭행으로 봤기 때문에 대상 범죄가 아닌 것으로 판단했지만 검찰에서는 이를 성폭력범죄로 판단해 기소했기 때문이다. 즉, 검찰의 판단에 따르면 부산 돌려차기 사건도 대상 범죄에 포함되는 것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이 사건에서 유튜버가 개인적으로 신상을 공개했던 점이다. 신림 묻지마 살인 사건 피의자도 법적으로 신상 공개가 결정되기 며칠 전부터 온라인에 신상이 알려졌다. 만일 이런 일들이 빈번해지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경찰과 검찰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됐지만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개인이 신상 공개를 할 경우에는 억울한 사례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의자 신상 공개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중요한 법익의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다. 그래서 추가 범행의 방지 등이 요구되고, 국민의 중대한 알 권리를 위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인(고위 공직자나 대중적 스타 등의 공적 인물)의 범행이나 공적 사안이 될 정도의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피의자 신상 공개가 허용돼야 하는 이유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yckim645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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